2007년4월25일(수) - 성 마르코 복음사가 >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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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묵상

[] 2007년4월25일(수) - 성 마르코 복음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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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작성일 : 2007-04-27 조회수 : 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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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25일 - 성 마르코 복음사가 [오늘의 복음] 마르 16,15-20b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15)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16)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17)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18)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19)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20)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 ▣ 성 마르코 복음사가 († 68년경) 신약성경으로 분류되는 네 복음서의 집필자는 아무도 자신의 이름을 저자로 밝히지 않고 있다. 현대인과는 달리 당시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이름보다 작품 자체의 내용이 더 중요했다. 초세기에 사실과는 무관한 다른 복음서들이 범람하자, 가짜 복음서들을 배격하고 참 복음서를 지켜야하는 일이 교회당국의 막중한 임무가 되었다. 이에 초기 교회는 복음서들을 서로 구별하고 필자들을 거론하기 시작하였다. 누가 복음서를 집필하였는지 처음으로 밝힌 사람은 소아시아 지방 히에라폴리스의 주교 파피아스(†130년경)였다. 그는 마르코가 베드로의 통역관으로서 사도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에 관해서 가르친 것을 기억나는 대로 충실히 기록했다고 전한다. 오늘날 학계에는 마르코복음의 마르코 친저성에 대한 논란은 많다. 마르코복음은 희랍 계통 이방인 그리스도인을 독자로 집필되었다. 성화를 보면 성 마르코는 복음서를 지니고 날개 달린 사자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데, 이는 세례자 요한을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마르 1,3)로 표현한 데서 유래하는데, 예술적 전승은 그 소리를 사자의 울음으로 비유하였다. 통상 마르코 복음서의 저자로 알려진 성 마르코는 “마르코라고도 불리는 요한”(사도 12,12-25)과 동일 인물이며, 신약성경에 모두 9번 등장한다.(사도 12,12-25; 15,37-39; 콜로 4,10; 2티모 4,11; 필레 1,24; 1베드 5,13) 마르코라는 로마식 이름은 전쟁의 신 ‘마르스’에게 봉헌된 자라는 뜻이다. 구전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나누신 장소가 바로 마르코의 집이었고, 어머니 마리아는 박해시절에도 자기 집을 사도들의 회의장소로 제공하였다고 한다. 마르코는 성 바르나바의 조카이며(골로 4,10), 키프로스 태생의 레위 사람이다. 성서학자들은 마르코가 예수님께서 체포되실 때, 몸에 고운 삼베만을 두른 채 예수님을 따라가다가 붙들리게 되자 삼베를 버리고 알몸으로 달아났던 그 젊은이로 간주하지만(마르 14,51-52) 확실한 근거는 없다. 마르코는 사도 바오로의 협력자로서 바르나바와 함께 안티오키아로 갔고(사도 12,25), 바오로 사도의 제1차 전교여행(45-49년경)에 동참하여 키프로스로 갔으나(사도 13,5), 밤필리아에서 바오로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온다.(사도 13,13) 사도 바오로는 제2차 선교여행(50-62년경)을 시작하면서 마르코와 바르나바가 밤필리아에서 자기를 버린 적이 있다고 해서 동행하기를 거부하자, 서로 감정이 격해져 따로 선교활동을 한다.(사도 15,39) 그러나 바오로가 투옥되었을 때에는 로마에 함께 있으면서 화해하였다.(콜로 4,10) 그는 또한 사도 베드로의 제자요, 통역관으로 활동하였는데, 베드로는 그를 애정 깊게 ‘내가 아들로 여기는 마르코’(1베드 5,13)라고 언급한다. 세월이 흘러 정확한 기록이 없다는 점이 아쉽지만, 전승에 의하면 바오로 사도가 마르코를 아퀼라와 알렉산드리아 지역에 복음을 전하도록 보냈으며, 복음서를 기록하도록 했다고 한다. 마르코는 65년경에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교회를 창설하고 주교직을 수행했다. 그 뒤 다른 곳에 복음을 전하고 알렉산드리아로 돌아 온 68년경에 이교도들에게 붙잡혀 감금되었다. 이교도들은 성인을 밧줄에 묶어 며칠 동안 돌이 깔린 동네를 끌고 다녔으며, 이에 성인의 살점이 날카로운 돌에 찢겨 묻어났다고 한다. 결국 폭행자들은 성인을 칼로 찔러 죽이고, 시신을 태워 없애려 했으나, 갑작스런 폭우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고, 나중에 신자들이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그 뒤 성인의 유해는 베네치아의 성 마르코 성당으로 옮겨졌고, 9세기부터 4월 25일을 성인의 축일로 기념하기 시작하였다. 오늘 성인의 축일을 맞이하여, 기존의 여러 그리스도교 전승을 충실히 수집하고 통합하여 복음서라는 새로운 선교방식을 창안하고, 자신의 목숨으로 이를 증언한 성인의 업적과 덕을 기리면서, 그를 본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