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8월2일(주일) - 연중 제18주일 > 복음 묵상

백삼위 한인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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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묵상

[] 2009년8월2일(주일) - 연중 제18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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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작성일 : 2009-08-01 조회수 : 2,0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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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중 제18주일 - 나해 [오늘의 복음] 요한 6,24-35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24) 군중은 거기에 예수님도 계시지 않고 제자들도 없는 것을 알고서, 그 배들에 나누어 타고 예수님을 찾아 카파르나움으로 갔다. 25) 그들은 호수 건너편에서 예수님을 찾아내고, “라삐, 언제 이곳에 오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2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27)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28) 그들이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2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30) 그들이 다시 물었다. “그러면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 31) ‘그분께서는 하늘에서 그들에게 빵을 내리시어 먹게 하셨다.’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3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 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33)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 34) 그들이 예수님께,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 하자, 3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복음산책]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는 이유 그날엔 갈릴래아 호수를 둘러싸고 숨바꼭질이 벌어졌다. 보리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오천 명이 넘는 군중을 배불리 먹이신 기적을 행하신 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홀연히 사라져버린 것이다. 군중은 제법 조직적으로 나누어 배를 타고 호수와 그 둘레를 샅샅이 물색했다. 결국은 카파르나움에서 놀이가 끝났다. 그랬다. 카파르나움이었다. 유다 지방의 중심에 예루살렘이 있다면 갈릴래아 지방의 중심에는 카파르나움이 있다. 카파르나움은 예루살렘만큼 중요한 장소로 부각된다. 여기서 놀라운 생명의 빵에 관한 가르침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카파르나움은 예수님께서 줄곧 거주하셨던 곳이며(마태 4,13), 이곳에서 많은 가르침과 행적(루카 4,23)이 베풀어졌다. 빵을 배불리 먹은 군중이 예수님을 다시 찾으려는 노력이 카파르나움에서 예수님과의 만남을 가능하게 하였다. 왜 그들이 예수님을 찾았을까?(24절) 도대체 그들은 무엇을 찾는 것일까? 그들은 분명 보리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오천 명을 먹인 예사롭지 않은 ‘예언자’를 찾고 있었으며, 그들을 다시금, 아니 매일 배불리 먹일 기적을 행할 수 있는 ‘임금’을 찾아 나섰던 것이다. 육신의 양식을 좇아 애써 찾아온 군중의 속셈은 이내 예수님에게 들키고 말았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26절) 그러나 이를 기회로 삼아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얻고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을 주시고자 하신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27절) 그렇다. 예수님께서 주시고자 하신 것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이다. 이것은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양식이다. ‘군중이 배를 타고 예수님을 찾아 카파르나움으로 갔다.’는 사실에서 ‘찾는다.’는 말은 이미 다 만들어진 것을 뒤지거나 두루 살펴서 발견해 내는 일이다. 때로는 요구하거나 청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랬다. 그들이 찾아 나선 것은 이미 ‘빵의 기적을 행한 예수’였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육신만을 배불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노력하기보다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 즉 추구하라고 강조하셨다. 여기서 불멸의 양식이란 이미 만들어져 있는 어떤 무엇이 아니라, 목적한 바를 이루고자 끝까지 좇아 구하는 과정과 노력을 말한다. 따라서 불멸의 양식은 이미 다 만들어져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찾을 수 없고 오직 추구될 수 있을 뿐이다. 불멸의 양식을 추구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조건은 불멸의 양식을 주시고자 하는 자를 믿어야 하는 것이 오늘 복음의 결론이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이 양식을 사람들에게 베풀라고 당신의 아들을 권능과 함께 세상에 보내셨다. 사람의 아들이 주려는 불멸의 양식을 추구하는데 있어 그 첫걸음이자 결정적인 조건은 ‘불멸이 양식이 어떤 것’인지를 묻기보다는 ‘불멸의 양식을 주시고자 하는 자’를 믿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빵의 기적을 행하신 그 장소에 머물러 계시지 않고, 호수 건너편에서 이곳 카파르나움으로 장소를 옮기신 것이다. 새로운 가르침을 위하여 수고스럽고 의도적인 장소의 이동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카파르나움에까지 와서 예수님을 찾아낸 군중이 새로운 가르침을 받기에 합당한 준비를 갖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머릿속은 빵의 기적에 대한 감동과 열광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은 곧 보통 사람들이 가지는 육적인 세계에 대한 갈증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능하다면 빵을 배불리 먹었던 기억을 군중의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어 하신다. 한꺼번에 둘 다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육적인 세계를 갈망하면 영적인 세계에 눈이 어두워지게 되고, 영적인 세계에 눈을 뜰 때 예수님을 믿을 수 있고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준비를 비로소 갖추게 된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도 있듯이 육신의 양식을 구하는 일은 일차적이며 본질적인 생물학적 욕구에 속한다. 비록 썩어 없어질 양식이긴 하지만 육신의 생명 부지를 위해서라면 누구라도 그 양식을 취해야 한다. 먹지 않고서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하기야 우린 늘 먹고 살기에 바쁜 사람들이다. 그러나 거기에만 머물지 말라는 것이다. 육신을 위한 욕구에만 머물지 말고, 그보다 더 귀한 영혼의 생명 유지를 위한 양식을 추구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원의다. 이 원의가 어떻게 성취되는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바라시는 것은 영혼의 생명을 위한 우선적인 인간의 업적이나 성덕이 아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당신께서 세상에 보내신 사람의 아들 예수님을 먼저 믿는 것이다. 이 믿음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뿐 아니라 사람의 아들 자체의 참 생명이 선물로 주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 복음의 유다인들은 불멸의 양식을 주는 자를 믿기 전에,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기적을 요구한다.(30-31절) 그들은 모세와 예수님을 대립시켜 모세는 하늘에서 빵을 내려다 자기 조상들을 먹이는(탈출 16,1-36; 시편 78,24; 지혜 16,20-29 참조) 기적을 보여주었는데, 예수님은 어떤 기적을 보여 믿음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지를 보여 달라고 한다. 사람들은 곧 믿음을 위해 기적(奇蹟)을 청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믿음이란 내심(內心)에 주어진 어떤 무엇에 대한 자유로운 응답(response)이다. 기적을 보고 믿는다면 그것은 기적이 믿음을 강요하는 셈이 되고 만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라. 그들은 항상 기적을 요구했고, 기적을 보고서야 믿었다. 이것이야말로 기적에 믿음이 강요당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참된 믿음이란 기적을 바탕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유의지의 온전한 결단으로 성립된다. 군중은 자신의 자유의지를 행사하기보다는 기적에 의존하려 하고 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빵의 기적과 비슷한 기적을 요구하고 있으니, 결국 육적 세계에 대한 욕심을 아직도 버리지 못한 채 예수님 앞에 서 있는 것이다. 이제 예수님의 부연설명이 이어진다. 그분은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다 조상들을 먹인 사람은 모세가 아니라 예수님 당신의 아버지라고 정정(訂正)하여 사람들의 오해를 풀고자 하신다.(32-33절) 예수님의 아버지는 다름 아닌 하느님이시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모세가 하늘에 청한 만나와 하느님께서 주시는 하늘의 빵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이집트를 탈출한 히브리인들이 광야생활을 하는 중에 일용할 양식이 넉넉지 못함을 불평하자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만나와 메추라기를 양식으로 주셨다.(탈출 16,1-36) 이 기록을 살펴보면 만나는 그야말로 하루의 양식이었고(안식일은 예외), 다음 날은 곰팡이와 구더기의 밥이었다. 그러나 오늘 하느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주시려는 빵은 세상에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이며, 굶주린 배를 채워주는 그런 빵이 아니라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람들이 예수님께 세상에 생명을 주는 하늘의 빵을 늘 달라고 청한다. 이에 예수님은 스스로가 생명의 빵이심을 선포하신다.(34-35절) 이 언명(言明)은 더 이상의 설명이 아니다. 이는 선포요, 폭로(暴露)이며 예수님의 자기계시이다. 사람들은 앞서간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듯 보인다. 조상에게 빵을 먹인 사람이 모세가 아니라 하느님 내 아버지라는 예수님의 자기계시적 언명(言明)도 쉽게 수긍하는 듯하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렇다. 예수님 스스로가 생명의 빵이라는 선포는 자신에 대한 결정적인 계시이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35절) 예수님 스스로가 생명에 대한 굶주림과 타는 갈증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다. 예수님이 생명의 빵이시기 때문이다. 이 빵을 얻기 위해서는 그분에게 가야하며, 그분에게 가는 것은 그분을 믿는 것이다. 그분은 빵의 기적을 행하신 그 날 밤, 호수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다가가 “나다.”라고 하신 바로 하느님 그분이시며, 이분이 바로 “나는 생명의 빵이다.”라고 자신을 구체적으로 폭로하신 하느님이시다.[◆박상대 마르코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