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7월5일(주일) - 성 김대건 안드레아 대축일 >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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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7월5일(주일) - 성 김대건 안드레아 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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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작성일 : 2009-07-04 조회수 : 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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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 5일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 [1821~1846] [오늘의 복음] 마태 10,17-22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17)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18)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19)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20)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21)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22)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복음산책] 순교자의 마지막 반려자(伴侶者)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산상설교(5-7장)와 기적사화(8-9장)에 이어 기록된 파견설교(10장)의 한 부분이다. 파견설교에 해당하는 마태오복음 10장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먼저 12제자를 선발하시고(2-4절), 그들을 파견하시면서 선교수행지침(5-15절)을 하달하신다. 스승인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파견을 마치 양들을 이리들 가운데로 보내는 것에 비유하시는 것을 보면(16절), 장차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는 빤한 일이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살아 계시는 동안에 무슨 일이 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포함한 그 이후에 복음 선포자와 그리스도 신자들이 당하게 될 박해를 미리 예고하시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두 가지 양상의 박해예고와 두 가지의 위로약속으로 구성되어 있다. ① 유다인들과 로마제국으로부터의 박해예고(17-18절)와 이에 대하여 성령에 의한 증거보장이 약속(20절)된다. ② 가족의 고발과 세상의 미움이 예고(21-22절)되고, 이에 대하여 종말론적 구원보장이 약속(23절)된다. 예수님의 죽음을 포함하여 초기 교회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교 신앙은 끊임없이 박해를 받아왔다. 그러나 박해의 모든 순간에 신자들은 예수님의 약속에 따라 성령으로 충만하여 복음을 증거하였으며, 끝까지 참고 견디어 냄으로써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다. 2000년 그리스도교회의 역사는 바로 이러한 순교의 역사이다. 그 역사 속에 오늘 우리 한국교회가 머리 숙여 깊이 경축하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 서 계신다. 그분은 우리 한국교회의 첫 사제이시고 한국의 모든 성직자들의 수호자이시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1846년(병오박해) 9월 16일 새남터 백사장에서 군문 효수형으로 순교하셨다. 김대건 신부님은 1821년 8월 21일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산 45의 1번지에서 아버지 김 이냐시오와 어머니 고 우르술라의 아들로 태어나 1836년 15세의 나이에 당시 프랑스 선교사 모방 나 신부님에 의해 안드레아로 세례를 받고, 즉시 최방제 프란치스코, 최양업 토마와 함께 중국 마카오로 비밀리에 유학을 떠났다. 성품이 바르고 재능이 출중했던 김대건은 5년간 유학생활 중에 라틴어, 불어, 영어, 중국어 등 5개 국어에 능통한 학생이었다. 당시 마카오 반란으로 인해 두 차례나 필리핀의 마닐라로 피난을 가서 롤룸부이에서 지내시기도 했다. 롤룸부이의 맨도사 가정은 아직도 찾아오는 한국인들에게 김대건 안드레아 신학생의 이야기를 들려준다.(본인은 1990년 7월에 그곳을 순례한 적이 있다.) 1844년 23세에 만주에서 부제품을 받고 한국에 잠시 입국하였다가, 다시 배를 타고 상하이로 가서 1845년 8월 17일 금가항 성당에서 한국교회의 최초 신부로 성품에 오르게 된다. 8월 31일 라파엘 호를 타고 페레올 고 주교님과 다블리 안 신부님을 모시고 상하이를 출발하여 9월 28일에 제주도에 도착하고, 그 후 42일 만에 충청도 강경리 나바위 교우촌에 도착한다. 신부님은 쉴 틈 없이 사목 하면서 다른 신부님들의 영입을 위해 노력한다. 1846년 6월 5일 또 다른 신부님들 영입을 위해 황해도의 순위도 근처에서 배를 띄우다 적발되어 체포, 서울로 압송되어 갖은 문초와 형고를 받으시고 9월 16일 사형장인 새남터로 끌려가셨다. 사제가 된지 1년 30일, 향년 26세의 꽃다운 나이에 순교하신 것이다. 신부님은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께서 한국의 다른 순교자 78위와 함께 복자품에 오르셨고, 현 요한바오로 2세 교황께서 한국선교 200주년 기념행사를 위해 방한하신 중 1984년 5월 6일 다른 복자 102위와 함께 성인품에 올려주셨다. 우리는 한국교회의 오늘을 있게 만든 어제의 주역들 가운데 죽음으로써 한국교회의 초석을 놓았던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성인을 기념하고, 그 천상탄일을 경축한다. 성인의 죽음은 불의의 사고도, 자신의 실수도, 강요당한 죽음도 아니었다. 신부님의 죽음은 ‘오직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1코린 10,31) 증거의 죽음이었고, 자신을 포기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을 비운’ 선택의 죽음이었으며, ‘스승을 닮고자 하는’ 적극적 죽음이었다. 모든 순교자의 죽음 곁에는 마지막 반려자(伴侶者)가 있었으니 이는 곧 “누구든지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면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마태 10,39)는 예수님의 말씀이었다.[◆박상대 마르코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