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8월9일(주일) - 연중 제19주일 > 복음 묵상

백삼위 한인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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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묵상

[] 2009년8월9일(주일) - 연중 제19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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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작성일 : 2009-08-09 조회수 :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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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중 제19주일 (나해) [오늘의 복음] 요한 6,41-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41)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유다인들이 그분을 두고 수군거리기 시작하였다. 42) 그들이 말하였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우리가 알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떻게 ‘나는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할 수 있는가?” 4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끼리 수군거리지 마라. 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리고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 45)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라고 예언서들에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 46) 그렇다고 하느님에게서 온 이 말고 누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은 아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이만 아버지를 보았다. 47)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48) 나는 생명의 빵이다.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50) 그러나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복음산책] 생명의 빵은 곧 성체(聖體)다. 빵을 배불리 먹었던 군중이 그들을 피해 숨어버리신 예수님을 카파르나움에서 찾아내었을 때 예수님은 단번에 그들이 애써 찾아온 의도와 숨은 마음을 알아차리셨다.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물리적인 배고픔의 해결사로 여겼을 것이고, 더러는 기막힌 기적장이 예수님을 ‘임금’으로라도 모셔서 더 많은 인생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보고 싶어 했을 것이고, 또 더러는 예수님을 정말 오시기로 되어 있는 예언자로 생각하고 그분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원했을 것이다. 예수님 측에서 볼 때 비록 군중이 ‘생명의 빵에 관한 신학(神學)’을 배울 준비를 갖추지는 못했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은 시작되었다. 그것은 그분에게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음을 아시기 때문이었다. 생명의 빵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선 섞어 없어지지 않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주는 빵에서 시작한다. 이 빵은 그래서, 하늘에서 내려와야 하는 것이다. 이에 예수님은 스스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41절)고 선포하신다. 세상은 늘 자기들 방식대로 빵을 찾아왔다. 태초의 인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간은 직접 또는 간접적인 방법으로 육체의 생명을 영위하기 위해 빵을 먹어야 했다. 그렇다고 사람이 영원히 세상의 빵만 먹을 수 없다. 때가 되면 빵을 먹을 수 있는 힘조차 없어진다. 그것이 곧 죽음이다. 모든 죽음은 육체의 생명에 종지부를 찍는 일이며, 세상의 빵을 더 이상 못 먹게 되는 일이다. 그래서 인간도 세상도 죽음으로 끝이 나는 것이다. 이런 세상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신 예수님을 단번에 받아들이거나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군중의 반응은 당연했다.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유다인들이 그분을 두고 수군거리기 시작하였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우리가 알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떻게 ‘나는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할 수 있는가?”(41-42절) 여기서 주목할 점은 요한복음사가가 이 대목에서부터 예수님 주위의 사람들을 막연한 ‘군중’ 대신에 ‘유다인들’이라고 지칭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로써 복음서 저자는 예수님께서 유다인들로부터 총체적인 불신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명백히 하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유다인들이 ‘생명의 빵’에 불신을 표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예수님께 그 빵을 달라고 청하하고 있기 때문이다.(34절) 따라서 그들의 불신은 오히려 ‘하늘에서 내려 왔다.’는 예수님 자신에 있다. 예수님 주위의 군중들은 거의 갈릴래아 출신으로서 예수님과 그의 부모를 모를 리가 없다. 동시에 이들은 ‘위로부터 난 적이 없기 때문에’(요한 3,3 참조)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 오셨다는 말씀의 참뜻을 알 리가 없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세상이 ‘영원한 생명을 빵’을 진정으로 원한다면 자신을 그 빵으로 지칭하는 예수님을 피해 갈 수는 없다는 점이다. 생명의 빵에 관한 신학은 이렇게 죽음으로도 끝나지 않는 영원한 생명의 빵에 관한 이야기이며 세상이 주는 섞어 없어지는 빵과는 전적으로 다른 하늘에서 내려온 빵에 관한 이야기다. 죽음으로 끝이 날 세상이 영원한 생명을 원한다면 우선 자신을 그 빵으로 내세우는 예수님께 나아가야 하며, 그를 믿어야 하고, 마침내는 그를 먹어야 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복음 앞에 인간의 태도는 늘 그렇듯이 눈에 보이는 것만 보려하는 점이 문제이다. 어떤 사람에 대하여 그의 가문이나 출신, 혈연이나 학벌 등으로 그를 다 안다고 해버리는 인간의 태도가 늘 걸림돌이 된다.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20년 이상을 목수의 아들로 살면서, 두 손안에 쥐어진 연장을 통하여 땀 흘리며 하느님께 바쳐진 시간들을 간과하고 있다. 그 시간들 안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자의식(自意識)을 키워나갔으며, 세상과 인류의 구원을 위해 하늘로부터 파견되었음을 깨달아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요 메시아로서, 구원된 세상이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도록 자신을 ‘생명의 빵’으로 내어주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신적(神的) 출처를 밝혀 유다인들의 ‘못마땅해 하는 마음’을 풀어주시기 보다는 이를 일축해 버리시고 하느님께로부터 배움을 받도록 권고하신다.(45절) 예수님께 다가오는 사람은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의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이다. 상당히 논리적이지만 풀리지 않는 신비(神秘)가 하나 있다. 그것은 인간의 믿음행위와 하느님의 선택의 관계이다. 사실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행위는 그 사람을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맡겨 주시는 행위로서 이는 동시에 발생한다. 오늘 복음에서 이 점은 상당한 무게로 강조된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44절) 어떤 인간도 자기 자신의 힘만으로 예수님을 믿을 수 없다. 하느님께서 그 인간의 가까이 또는 내심(內心)에서 그를 불러주셔서 하느님 생명의 공동체로 이끌어 주셔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느님께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무시하지는 않으신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움직여 주시면, 인간은 동시에 자유로이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인간은 예수님께 대한 믿음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믿음의 행위는 인간의 자유 의지적 결단인 동시에 하느님의 선택적 선물인 것이다. 누구든지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45절) 일단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께로 오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보장된다.(47절) 예수님이 바로 생명의 빵이시며(48절), 이 빵을 그에게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 빵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조상들이 먹고도 죽어간 그런 만나와 같은 빵이 아니라 먹으면 죽지 않는 빵이다.(50-51절) 이제 세상에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빵이 선사되었다. 이 빵은 바로 예수님의 살이요, 하느님의 거룩한 몸이요, 성체(聖體)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