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9월13일(주일) - 연중 제24주일 > 복음 묵상

백삼위 한인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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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묵상

[] 2009년9월13일(주일) - 연중 제24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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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작성일 : 2009-09-18 조회수 : 2,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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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중 제24주일 (나해) [오늘의 복음] 마르 8,27-35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실 것이다.> 27)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카이사리아 필리피 근처 마을을 향하여 길을 떠나셨다. 그리고 길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28)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29)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30)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31) 예수님께서는 그 뒤에,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32)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3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신 다음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며 꾸짖으셨다. 34)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군중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35)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복음산책] 함구령의 의미를 풀어라. 이스라엘의 최북단에 자리 잡은 헤르몬 산(2,814m)은 하느님의 은혜와 축복과 생명을 상징한다.(시편 133,3) 이 산은 만년설로 덮여 있고 요르단 강의 시원(始原)이 된다. 이 산으로부터 남쪽으로 약 40Km를 내려오거나, 갈릴래아 호수에서 북쪽으로 약 40Km를 올라가면 병풍처럼 둘러친 바위 아래서 솟아오르는 지하수를 중심으로 세워진 아름다운 도시 카이사리아 필리피를 만난다. 헤로데 대왕이 먼저 이 도시를 세워 ‘바니아스’라 불렀고, 그의 아들 헤로데 필립보가 로마 황제의 이름을 덧붙여 그에게 바쳤다. 우상 숭배가 성행하고 강력한 로마 제국에 매혹되어 하느님께서 주신 땅을 이방인에게 바친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벳사이다에서 소경을 치유하신 후 곧장 제자들을 데리고 카이사리아 필리피로 길을 떠나셨다. 이제 이 도시를 바라보시면서 자신의 정체에 관한 질문을 던지고 제자들의 고백을 받으신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자신의 정체에 관한 예수님의 질문과 예수님께 대한 베드로의 신앙고백(27-30절)과 예수님의 첫 번째 수난예고(31-33절)에 관한 대목으로서 곧 있게 될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사건(9,2-29)의 도입부 역할을 한다. 이에 관한 기사는 공관복음 모두에 실려 있다. 공관복음서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에서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까지 같은 순서를 따르고 있는 바, 그 순서는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 ->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 번째 예고’ -> ‘예수 추종의 길’ -> ‘종말의 시기에 관한 말씀’ -> ‘주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사건’이다.(마태 16,13-17,9; 마르 8,27-9,10; 루카 9,18-9,36)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두 가지 질문을 던지셨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리고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질문이다. 사실 첫 번째 질문보다는 두 번째 질문이 더 중요하다. 왜냐하면 두 번째 질문은 “너희는 무엇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고 있느냐?”, 그래서 “너희가 나를 따르는 목적이 나로 인하여 달성될 수 있다고 보느냐?”는 질문과 같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이제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3년가량 따라다니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근거로 자신들의 스승인 예수님이 자기들과 관련하여 도대체 누구인지를 답하라는 요구를 받고 있는 것이다. 이 요구를 제자들은 피해 갈 수 없으며, 어떤 모양으로든 답을 내놓아야 한다. 세례자 요한을 목 베어 죽였던 헤로데 안티파스는 예수님을 ‘되살아난 요한’(마르 6,16)으로 착각하는 정신분열증을 보였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엘리야, 예레미야, 또는 다른 예언자로 여기는 등 예수님의 정체에 대한 분분한 의견을 보였다. 이런 의견들을 참고로 제자들은 직접 답을 내야 했던 것이다. 베드로가 제자단을 대표하여 나서서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29절)하고 대답한다. 마태오복음에서는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16,16)로, 루가복음에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9,20)로 고백하는 반면, 마르코복음에는 단순히 ‘그리스도’로 돼있다. 하여간 공관복음서의 공통고백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란 ‘도유(塗油)된 자’로서 메시아를 뜻한다. 그런데 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즉각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말라고 단단히 당부하시는 것일까?(30절) 마태오복음에도 함구령이 붙어있지만(16,20), 그 사이에 베드로의 고백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와 찬사, 그리고 세 가지 약속을 첨가하였다. 이는 마태오 자신의 독자적인 편집임이 확실하다. 함구령 다음에 이어지는 대목은 예수님의 첫 번째 수난에 관한 예고와 이에 대한 베드로의 반응이다.(31-33절) 예수님께서는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할 것, 그리고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을 예언하신다. 많은 고난과 죽음에는 치욕적인 놀림과 침 뱉음과 채찍 등이 포함되어 있다.(마르 10,34; 14,65; 요한 18,22) 다음으로 이에 대한 베드로의 반응을 보자. 그것은 지나치게 예민하다. 그는 스승을 붙들고 펄쩍 뛰었다. 베드로의 과민반응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 또한 준엄하기 이를 데 없다. 베드로를 물러가야 할 ‘사탄’이라 꾸짖으신 것이다. 그런데 이 질타의 말씀은 베드로가 ‘사탄’이라기보다는 그의 마음속에 들어있는 사탄을 향한 것으로 봄이 옳을 것이다. 그 사탄이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기’(33절)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왜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훌륭한 신앙고백을 ‘함구령’으로 일축하셨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겉으로는 장황한 그의 신앙고백이 내용으로는 형편없었음을 아셨던 것이다. 이는 베드로뿐 아니라 제자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사실이다. 오늘 복음의 전체적인 이해를 필기시험과 실기시험이라는 개념으로 시도해 볼 수 있겠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필기시험으로 볼 때 100점이다. 예수님께서 달리 채점하지는 않았으나 예수님의 정체에 대한 정답으로 간주된다. 예수님의 수난예고를 제자들이 함께 겪어야 할 실기시험으로 본다면, 베드로는 0점을 맞은 것이다. 필기 100점과 실기 0점의 현저한 편차는 중간에 삽입된 ‘함구령’으로 풀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아직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제자들이 [예수님=그리스도÷고난과 죽음과 부활]의 도식을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베드로가 내어놓은 정답이 고난과 죽음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난예고에 대한 베드로의 지나친 반응은 그의 마음속에 있는 (사탄의) 생각을 드러낸 것이었다. 이 생각이 겉으로 정확한 고백(필기 100점)을 실제로는 형편없는 고백(실기 0점)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이제 마음속의 사탄을 몰아내고 진정한 그리스도로서의 예수정체를 깨달아야 하는 것은 베드로의 인생숙제가 되었다. 베드로는 자신의 남은 생애를 통하여 이 숙제를 풀어야 하는 것이다. 나아가 이 숙제는 우리들에도 똑같은 비중으로 주어져 있을 것으로 믿는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부분은 이 숙제를 푸는 데 꼭 필요한 힌트가 될 것이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34-35절)[◆박상대 마르코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