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9년3월22일(주일) - 사순 제4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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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순 제4주일 - 나해 [오늘의 복음] 요한 3,14-21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니코데코에게 말씀하셨다.)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15)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18)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19)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20)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21)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복음산책] 빛과 진리의 삶에로 초대받은 사람들 무르익어가는 은총과 회개의 사순시기가 사순 제4주일을 맞이하여 그 절반을 넘어선다. 시작이 반이라 했으니, 이제 교회는 그 절정을 향하여 깃발을 올린다. “래따레(laetare), 예루살렘!” - “예루살렘아, 기뻐 즐거워하여라.” 이는 오늘 주일의 또 다른 이름이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오늘 사순 제4주일을 “래따레”(laetare; 즐거워하라) 주일이라 부르며, 가능하다면 사제는 장밋빛 제의를 입고 미사를 드린다. 오늘 ‘래따레 주일’은 회개의 상징인 극기와 보속(기도, 단식, 선행)으로 지내온 사순절의 반환점에서 자칫 지쳐버릴지도 모르는 우리 영혼과 육신을 기쁨과 즐거움으로 재충전하자는 전례주기 흐름상의 의미를 가진다. 오늘 주일의 이름은 미사전례의 시작을 알리는 입당송 “즐거워하여라. 예루살렘아! 그를 사랑하는 이들아, 모두 모여라. 애도하던 이들아,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위로의 젖으로 흡족해하며 기뻐 뛰리라.”(이사 66,10-11)에서 따온 것이다. 이스라엘이 기뻐하고 즐거워할 이유가 있었는가? 물론 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잠시 살펴본다면 말이다. 기원전 1030년경에 사무엘이 사울을 왕으로 기름 부어 성별함으로써 히브리인들은 판관시대를 매듭짓고 꿈에도 그리던 왕정시대를 펼치게 된다.(1사무 11-12장) 그러나 기원전 931년, 다윗을 이어 솔로몬이 통치하던 왕국이 왕자들의 난으로 두 동강이 나고, 북쪽에는 이스라엘왕국이 남쪽에는 유다왕국이 들어선다. 그러나 북쪽은 721년, 아시리아에 점령당하고, 남쪽 또한 586년에 바빌로니아의 침략에 의해 망한다. 이때부터 그들은 바빌론으로 끌려가 538년까지 치욕과 굴욕의 유배시절을 보낸다. 그러나 오늘 제1독서의 말씀처럼 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킨 페르시아의 황제 키루스는 재위 1년에 칙령을 반포하여 바빌론에 끌려와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해방과,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을 천명한다.(2역대 36,22-23) 이에 예루살렘이 기뻐하고 즐거워할 이유는 충분하다. 유배시절, 바빌론 강기슭에서 시온을 생각하며 눈물짓던 그들이 키루스 왕의 칙령을 받들어 귀양살이를 풀고 고향을 향한 기쁨은 오늘 복음말씀을 통하여 또 다른 모양으로 선포된다. 이는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와의 대화에서 밝혀주신 계시로서 “하느님께서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고,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16-17절)이라는 말씀이다. 즉,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께서 창조하신 세상과 사람을 너무나, 그리고 극진히 사랑하신 나머지, 자기 외아들을 내주시어 십자가에 높이 달리게 하셔서, 온 세상이 이를 쳐다봄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는 것이다. 이는 하느님의 인간구원에 대한 복음의 요약이며 결론이다. 복음은 결국 하느님께서 스스로 창조하신 세상을 너무나, 그리고 극진히 사랑하시는 동기(動機: motivation)에서 비롯하여, 자기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어 십자가에 높이 달려 죽게 하시는 방법(方法)을 통하여,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그분을 쳐다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목적(目的)을 선포하는 기쁜 소식이다. 하느님께서 그토록 사랑하시는 세상(世上)의 정체는 무엇인가? 세상은 우선 우리 인간이 사는 곳이다. 온갖 악(惡)과 불의(不義), 고통과 죽음이 한데 뒤섞여 질서 없이 춤을 추는 그런 곳이다. 이러한 세상은 비구원적 상태, 그 자체이다. 비구원적 세상에 대한 인간의 경험은 구원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그렇다고 해서 구원이 자연발생적으로 주어지거나 툭하면 죄에 빠져 허덕이는 나약한 인간의 힘으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제2독서 참조) 세상의 많은 종교들(특히 힌두교, 불교, 유교, 도교 등의 동양종교)이 그런 착각에 빠져 있다. 그들은 자신의 능력이나 고도(高度)로 수련된 삶을 통하여 적어도 구원을 성취할 수 있다는 아집에 빠져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을 구원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너나 나만의 구원이 아니라, 전적으로 비구원적 상태에 빠져있는 ‘세상 전체의 구원’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세상을 하느님은 극진히도 사랑하신다. 그렇다고 세상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니다. 세상이 벌어들인 것은 교만과 죄로 말미암은 멸망과 죽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세상을 사랑하신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며(1요한 4,8), 그 사랑이 세상을 창조하였기 때문이며, 이 사랑이 하느님 스스로를 사람이 되게 하였기 때문이다. 이 사랑만이 자신의 외아들을 세상에 보낼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느님께서 극진히 사랑하시는 자기에게 파견된 외아들을 믿는 일 뿐이다. 믿지 않는 사람은 죄인으로 판결 받는다. 이 판결은 하느님이 내리시는 것이라기보다 불신(不信), 그 자체가 불신자(不信者)에게 내리는 판결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십자가에 높이 매달려 죽은 하느님의 아들을 우선 쳐다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을 믿고 복음을 믿는 일이다.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님을 쳐다보는 것은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이르기 전에 수도 없이 불평한 대가로 하느님께서 보내신 불 뱀에 물려 죽을 때, 모세가 하느님의 명을 받들어 구리로 만든 뱀을 기둥에 높이 달고, 그 구리 뱀을 쳐다보는 사람은 죽지 않고 살아났던 기적과도 같은 것이다.(민수 21,4-9 참조) 우리도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님을 쳐다보는 일로 일단은 구원의 길에 들어선다. 그 다음으로 예수님이 그리스도요 하느님의 아들임을 믿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이란 현실적 삶의 연장도 아니오, 현재의 삶이 끝나고 덤으로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이미 이 세상 안에서 악과 어둠보다는 진리와 빛을 더 사랑하는 삶 속에 시작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어둠보다 빛을, 악보다는 진리를 더 사랑하는 하느님의 아들딸이 되어 빛 속에서 진리를 실천함으로써 하느님께서 이루신 놀라운 일을 만방에 드러내야 삶에로 초대받은 사람들이다.[◆박상대 마르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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