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1월11일(주일) - 주님 세례 축일 > 복음 묵상

백삼위 한인성당
  • 복음 묵상

복음 묵상

[] 2009년1월11일(주일) - 주님 세례 축일

페이지 정보

작성자 : 작성일 : 2009-01-10 조회수 : 2,004

본문

◉ 주님 세례 축일 (나해) [오늘의 복음] 마르 1,7-11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7) [요한은] 그리고 이렇게 선포하였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9) 그 무렵에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오시어, 요르단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10) 그리고 물에서 올라오신 예수님께서는 곧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11) 이어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복음산책] 예수님이 받으신 세례의 의미 오늘 주일은 ‘주님 세례 축일’로서, 주님의 성탄시기와 공현시기를 마무리하고 연중시기를 시작하는 첫 주일이다. 오늘 축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사실(마태 3,13-17; 마르 1,9-11; 루카 3,21-22)을 기념하는 날이다. 물론 오늘 축일이 예수님의 세례사건만을 단순히 기념하자는 것은 아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후 하느님 아버지와 성령과 함께 동등한 삼위격의 한 분이신 성자로 계시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특히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그 마음에 드는 아들(시편 2,7)로 계시된다는 것이다. 이로써 예수님은 당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일, 즉 세상의 구원사업을 위한 공생활을 시작하신다. 예수님의 세례를 통하여 우리 그리스도인 자신들도 성삼의 이름으로 받은 세례를 기억하면서 세례의 은총을 새롭게 하여 예수님의 공생활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세례가 담고 있는 엄청난 의미를 하나씩 짚어 보자. 우선 공관복음을 바탕으로 살펴보겠다. 마태오와 마르코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사실이 명확히 기록되어 있으나, 루카복음에는 그렇지 않다. 마태오는 세례를 받으러 오신 예수님을 두고 요한이 처음에는 이를 거절하지만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방편으로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었다고 전한다. 루카는 세례자 요한의 활동과 예수님의 세례사건 사이에 요한의 투옥사건(3,19-20)을 삽입함으로써 누가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었는지를 밝히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요한의 제자가 세례를 베풀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요한의 이름이 거명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가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지 않았다고 주장할 근거는 하나도 없다. 따라서 문제의 해결점은 시간적 서술에 어긋나는 ‘세례자 요한의 투옥사건’을 삽입한 이유에서 찾아야 한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시피 마태오와 마르코는 세례자 요한이 잡혀 옥에 갇힌 직후에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신 것으로 일제히 보도한다.(마태 4,12-17; 마르 1,14) 이는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의 시점을 세례자 요한의 활동이 끝난 시점에 두고자 함이다. 그런데 루카는 세례자 요한의 투옥사건이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신 계기가 아니라는 점을 밝히고 싶었던 것이다. 따라서 루카는 세례자 요한의 투옥사건을 앞당겨 기술하고, 그 다음에 예수님의 세례사건을 보도함으로써 예수님의 세례사건이 공생활시작의 계기가 됨을 시사하고 있다. 이렇게 공관복음이 예수님의 세례사건을 두고 기술하는 내용은 다소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첫째, 예수님의 세례는 그리스도교 세례성사의 제정이다. 요한의 세례가 죄의 회개를 촉구하는 물의 세례였다면, 예수님의 세례는 죄를 용서하는 성령과 불의 세례이다. 아무런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도 죄인들의 대열에 함께 서셔서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것은 사람의 아들로서의 예수님이 죄인인 백성들과 연대하여 하느님 앞에 자신을 굴복시킨 것을 의미한다. 이로써 신약의 세례는 죄를 용서하는 성사(聖事)로 제정되는 것이다. 둘째, 예수님의 세례 사건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자기계시 사건이다.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시는 예수 위로 비둘기 형상으로 하느님 성령께서 하강하시고, 그 위에서 아들을 확인하는 아버지 하느님의 음성이 울려 퍼짐으로써 온전한 삼위일체의 하느님이 계시된다. 이로써 신약의 세례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베풀어진다.(마태 28,19)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세례는 성령의 시대를 선포하며 독자적인 성령의 능력을 부각시키는 사건이다. 그래서 루카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의 능력을 받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도록 특별히 지시하신 것(루카 24,49)을 기록하고 있으며, 사도행전에서 성령의 능력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예수님의 세례는 메시아이신 주님의 ‘제2의 공현(公顯)’이다. 우리는 이미 주님 공현 대축일을 통해서 한낱 갓난아기인 예수님이 동방박사들의 방문을 받음으로써 온 천하에 구세주로 드러나심을 경축하였다. 그러나 아기 예수님은 어디까지나 미래의 구세주를 위한 가능태이다. 이는 곧 한 아기가 지니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의미하며, 이 가능성은 다시금 무한한 다양성에로 열려 있다. 따라서 예수님의 세례는 메시아로서의 아기 예수님이 30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소신 있게 키워오고 지켜온 메시아로서의 예수님 자의식의 완성이다. 이점은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11절)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보증된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공현은 세례를 통하여 공증(公證)된 셈이다. 넷째, 예수님의 세례는 기도와 성령의 능력을 바탕으로 한 복음선포의 시작이다. 우리가 세례성사를 통하여 성령의 힘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 예수의 제자가 되듯이, 예수님의 세례는 우리 세례의 원형이요 길잡이다.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통하여 복음선포의 공생활을 시작하셨듯이 우리도 세례를 받는 순간 복음선포의 공생활로 초대되었다. 유아세례를 받은 사람은 성숙의 나이에 배령하는 견진성사를 공적인 복음선포에로 불리는 계기로 삼을 수 있겠다. 예수님의 세례는 이로써 제정된 신약의 모든 세례성사를 받은 사람들을 예수님의 삶에로 끌어들인다. 예수님의 삶과 길은 곧 나의 삶이요 길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나에게 다른 삶과 길은 없다. 예수님께서 가신 광야도 갈릴래아도 예루살렘도 곧 내가 가야 하는 곳이며, 최종적으로 그분의 십자가 또한 나의 십자가가 되어야 한다.◆[박상대 마르코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