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3월15일(주일) - 사순 제3주일 > 복음 묵상

백삼위 한인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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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묵상

[] 2009년3월15일(주일) - 사순 제3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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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작성일 : 2009-03-12 조회수 :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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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순 제3주일 (나해) [오늘의 복음] 요한 2,13-25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13)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14) 그리고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 16)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17) 그러자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라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생각났다. 18) 그때에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 하고 말하였다. 19)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20) 유다인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 21)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22)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23) 파스카 축제 때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는 동안, 많은 사람이 그분께서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고 그분의 이름을 믿었다. 24)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신뢰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다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25) 그분께는 사람에 관하여 누가 증언해 드릴 필요가 없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사람 속에 들어 있는 것까지 알고 계셨다.◆ [복음산책] 생명이 솟아나는 살아있는 하느님의 성전 예수님의 예루살렘성전 정화 행적은 네 복음서 모두가 전하고 있는 사건이다. 그런데 공관복음서(마태오, 마르코, 루카)가 이 사건을 예수님의 공생활 말기, 즉 예수님의 성대한 예루살렘 입성 직후에 있었던 행적으로 전하고 있는 데 비해,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에 두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예수님의 성전정화사건이 정확히 어느 시점에서 발생했던 간에 그 내용은 같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이 정화사건을 통하여 주시고자 하는 가르침은 사건의 발생 시점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요한복음이 이 사건을 예수님의 공생활 서두에 둠으로써 성전정화의 의미가 공생활 시작과 큰 관련이 있음을 암시한다. 예수님께서 오늘 의노(義怒)와 열정으로 정화하시는 예루살렘성전은 이스라엘의 종교와 삶의 모든 것이었다. 예루살렘 성전 안에 모세를 통하여 야훼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체결된 계약의 궤가 모셔져 있었고, 이는 야훼 하느님의 현존을 상징하는 동시에 그분 백성의 선민(選民)과 구원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오늘 미사전례의 제1독서, 탈출기 20장이 선포하는 십계명의 증거판이 바로 그것이다. 다윗과 솔로몬 왕을 거쳐 완성된 이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의 전부요 심장이었다. 그러나 참담한 이스라엘 역사의 현실은 나라를 쪼개고 갈라놓았고, 백성들을 뿔뿔이 흩어놓고 말았다. 흩어진 백성들은 ‘시나고그’라는 회당을 지어 말씀의 전례를 거행하며 선민과 구원의 위로로 삼았지만, 늘 ‘새 예루살렘’을 꿈꾸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막대한 비용과 수고를 감수하며 해방절, 오순절, 맥추절에는 반드시 예루살렘과 그 성전을 순례하였던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이스라엘의 신앙과 신학은 에제키엘 예언서에도 잘 드러난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천사에게 이끌려가서 직접 본 성전에 관한 환시를 이렇게 묘사하였다. “주님의 집 정면은 동쪽으로 나 있었는데, 주님의 집 문지방 밑에서 물이 솟아 동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 물은 주님의 집 오른쪽 밑에서, 제단 남쪽으로 흘러내려 갔다. … 그가 나에게 말하였다. ‘이 물은 동쪽 지역으로 나가,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로 들어간다. 이 물이 바다로 흘러들어 가면, 그 바닷물이 되살아난다. 그래서 이 강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우글거리며 살아난다. 이 물이 닿는 곳마다 바닷물이 되살아나기 때문에, 고기도 아주 많이 생겨난다. 이렇게 이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 … 그러나 늪과 웅덩이 물은 되살아나지 않은 채, 소금을 얻을 수 있도록 남아 있을 것이다. 이 강가 이쪽저쪽에는 온갖 과일나무가 자라는데, 잎도 시들지 않으며 과일도 끊이지 않고 다달이 새 과일을 내놓는다. 이 물이 성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 과일은 양식이 되고 잎은 약이 된다.’”(에제 47,1-12) 그렇다. 주님의 성전은 생명의 물이 샘솟는 곳으로서 이 물은 생명의 양식과 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 그 성전의 참된 상징과 의미는 장사꾼들의 지나친 상혼(商魂, a commercial spirit, aggressive salesmanship)에 가려있었고 그 뒤엔 제사장들의 권력과의 결탁이 있었다. 시편(122장)의 저자가 “주님의 집으로 가자할 제, 나는 몹시 기뻤노라. 예루살렘아, 네 성문에 이미 우리 발이 서 있구나.” 하고 노래했듯이 예수님의 발걸음도 처음에는 그랬다. 그러나 성전 뜰에 들어섰을 때 그 기쁨이 사라져버렸다. 하느님이 몸소 현존하여 계시기에 더 없이 거룩한 곳, 그분의 백성이 찾아와 영광과 찬양을 드리고, 삶의 무거운 멍에를 내려놓고 그분과의 만남과 친교 안에서 안식과 평화를 얻는 곳, 기도하고 참회하여 자비와 용서를 구하는 곳, 그 예루살렘 성전이 온갖 상혼들로 뒤덮여 있었다. 제사에 쓰일 동물들을 사고파는 인파들, 성전세금을 위해 돈을 바꾸어주는 환전상들, 동물들 울음소리와 동전 땡그랑거리는 소리들, 흥정과 경매를 부르짖는 사람들 소리, 거기에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온갖 속임수와 바가지 소리들까지… 예수님께서는 의노의 열정으로 채찍을 내리치고 상판을 둘러엎으시면서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16절) 하셨다. 이제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전 인류의 구원을 위한 사역(使役)의 시작에서 예수님은 팔을 걷어 올리고 손에 빗자루를 손에 드셨다. 이는 유대교를 말끔히 청소하기 위함이며, 구약(舊約)을 폐기하고 신약(新約)을 세우시기 위함이었다. 깜짝 놀라 몰려온 유다인들이 도대체 이런 행위를 할 수 있는 권한이 있음을 표징으로 보여 달라 요구하자, 예수님은 이미 의도하신 바를 폭로(暴露, apocalypse)하신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19절) 그랬다. ‘사람의 아들’의 죽음과 부활로 세워질 신약의 새로운 성전,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당신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46년이 걸려 지었든, 수백 년이 걸려 지었든, 아무리 화려하고 웅장하게 지었든, 그 속에 치장되어 있는 어떤 유명한 화가와 작가의 작품들이 지금 이 시각에도 수없이 많은 순례객과 관광객을 끌든, 이제 참된 하느님의 성전은 오직 하나뿐,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워질 성전뿐인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죄를 씻어, 그들을 하느님 아버지 나라의 상속자 드리기 위해 스스로 자신의 몸을 제물로 삼아 십자가 제단에 바침으로써, 그래서 죽고 묻혀 부활하심으로써 속죄와 용서의 성전, 화해와 친교의 성전, 사랑과 평화의 성전, 구원과 생명의 성전이 되신 것이다. 새로이 맺어지는 신약의 참된 성전은 사람의 손으로 세워 바치는 건물이 아니라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인 셈이다. 그렇다면 그분의 몸을 받아 모시는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물론 그 또한 그리스도의 성전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말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 3,17)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심으로써 우리 스스로가 살아있는 하느님의 성전, 성령의 궁전이 되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아울러 성전의 경건함과 거룩함을 잃지 않기 위하여 쉼 없이 무엇을 정화해야 하는지도 잊지 말아야 한다.[◆박상대 마르코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