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5월3일(주일) - 부활 제4주일 > 복음 묵상

백삼위 한인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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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묵상

[] 2009년5월3일(주일) - 부활 제4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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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작성일 : 2009-05-02 조회수 : 2,0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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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활 제4주일 (나해) - 성소주일 [오늘의 복음] 요한 10,11-18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 11)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12) 삯꾼은 목자가 아니고 양도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 그러면 이리는 양들을 물어 가고 양 떼를 흩어 버린다. 13)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14)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15)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 16) 그러나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될 것이다. 17)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 18)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다. 나는 목숨을 내놓을 권한도 있고 그것을 다시 얻을 권한도 있다. 이것이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받은 명령이다.”◆ [성소주일] 오늘 부활 제4주일은 46번째 맞이하는 성소(聖召)주일이다. 1963년 교황 바오로 6세께서는 심각한 사제부족으로 목자 없는 양떼가 너무 많아진 사실을 심려한 나머지,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37-38)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매년 부활 제4주일을 성소(聖召)의 날로 정하였다. 이 날은 세계의 온 교회가 한 마음으로 많은 젊은이들이 착한 목자이신 주님의 뜻에 따라 ‘사람 낚는 어부’(마태 4,19)로서의 사제성소(司祭聖召)에 응답하도록, 그리고 청빈과 순명과 정결의 복음삼덕에 자신을 봉헌하는 수도성소(修道聖召)에 응답하도록 열심히 기도하는 날이다. 나아가 그리스도신자 모두가 각자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결혼(結婚)성소, 평신도(平信徒)성소 등의 하느님의 부르심에 충실히 응답할 것을 촉구한다. [복음산책] 착한 목자 예수님 성소주일은 다른 말로 “착한 목자의 주일”, 또는 “거룩한 부름의 주일”이라고도 한다. 그 뜻은 모든 사제와 주교들이 양떼를 위하여 목숨까지 내어놓는 착한 목자이신 주님을 본받아 희생과 봉사의 삶을 살도록 노력하고, 많은 젊은이들이 이러한 삶을 기꺼이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제성소와 수도성소에 응답하도록 기도하며, 나아가 세상 곳곳에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든 평신도들이 하느님의 거룩한 부르심에 나름대로 응답하여 합당한 삶을 살도록 노력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성소주일인 부활 제4주일에는 ‘목자와 양’의 비유가 담겨있는 요한복음 10장을 미사전례 복음으로 봉독한다.(가해: 10,1-10; 나해: 10,11-18; 다해: 10,27-30) 믿는 이들이 어떠한 성소에 응답하던 모든 성소의 모델은 예수님의 착한 목자로서의 자기계시이다. 오늘 복음은 착한 목자로서의 예수님 자기계시를 가능하게 하는 ‘목자와 양’의 비유이다. 오늘 복음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요한복음 9장의 내용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요한복음 9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만난 태생소경을 고쳐주신다.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은 누구의 죄 탓이 아니라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전제하신(3절) 예수님께서는 그 날이 안식일인데도 불구하고 ‘땅에 침을 뱉고 그것으로 흙을 개는’ 수고를 통하여 소경에게 광명을 되찾아 주신다.(6-7절)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놀라운 기적과 예수님께서 동시에 안식일 법을 어겼다는 사실을 놓고 논쟁의 도가니로 빠져든다.(13-16절) 그들은 소경의 부모까지 불러다가 심문을 하게 되고, 급기야 치유를 받은 소경과 논쟁을 벌인다. 바리사이파 사람들과의 논쟁에서 치유 받은 소경은 기적을 베푼 자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자기가 마치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처럼 예수님을 ‘예언자’(17절)요, ‘하느님에게서 오신 분’(33절)으로 주장한다. 결국 그는 소경의 죄를 뒤집어쓰고 태어났다는 이유로 회당에서 쫓겨난다.(34절) 그 후 그는 자기를 치유해 주신 예수님을 뵈옵고 사람의 아들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자 바리사이들이 함께 있는 그 자리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39절)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을 듣고 바리사이들이 자신들은 눈먼 자들이 아니라고 자부한다.(40절) 이에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41절)고 말씀하심으로써 소경이 죄인이 아니라 오히려 잘 보는 바리사이들이 죄인임을 역설하신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소경치유(9장)에 이어 “목자와 양과 양 우리의 문”의 비유(10장)를 말씀하신다. 그러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이 비유의 뜻을 전혀 깨닫지 못한다. 우리는 9장에서 치유된 소경이 예수님을 ‘예언자요 하느님에게서 오신 분’으로 고백한 이유로 회당에서 쫓겨났음을 보았다. 회당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선택받은 하느님 백성의 시민권을 박탈당하는 것이며, 구원에서 배제됨을 의미한다. 즉, 하느님 백성의 목장(牧場)에서 쫓겨남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쫓겨난 자는 버려진 양이요, 목자 없는 양이며, 양 우리 없는 양이 되는 셈이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버려지고, 그래서 목자 없는 외로운 양, 그러나 예수님께 신앙을 고백한 양들을 위한 복음이 된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양은 새로운 하느님 백성의 목장에서 풀을 뜯고 사는 양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양들이 드나드는 문이시며, 그들을 위해 목숨까지 내어놓는 착한 목자가 됨을 선언하신다. 예수님 외에는 어떤 구원의 진리도 없으며,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구원의 목장에 들어갈 수 없다. 구원의 문이신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 양 우리로 들어가는 사람이나, 예수님보다 먼저 양 우리에 들어와 있는 자는 모두다 도둑이며 강도가 된다. 하느님의 진리는 오직 예수님의 음성에서 시작되며, 참 생명은 오직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는 행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는 목자와 양 사이에 음성을 통한 쌍방 인식이 전제된 것이며, 그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쌍방 인식과도 같다. 통상 양을 키우는 목자들은 양과 자기 사이의 쌍방의 통교나 인식 따윈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양을 키우는 목적은 양 자체가 먹을 거리와 입을 거리를 제공하며, 나아가 돈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양과 목자의 관계를 비유로 삼아 자신을 착한 목자로 선포하시는 예수님은 양을 키우는 목적이 양들로부터 무엇을 얻고자 함이 아니라, 오히려 그 양들에게 생명을 주고자 한다는데 놀라움이 있는 것이다. 나아가 그 생명은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이 자신의 생명을 양들을 위해 내어놓으심으로써 가능하게 된다. 그분이 자신의 생명을 양들을 위해 내어놓는 이유는 어떤 대가를 바래서가 아니다. 쌍방 인식을 근거로 목자가 양들을 위한 전적인 자기증여가 그 이유이며, 이로 인해 아들이 아버지의 사랑을 누릴 수 있는 것이 그 이유이다. 아무도 아들의 목숨을 강요할 수 없다. 다만 아버지에 대한 전적인 충성과 완전한 자유의지에 의해 아들은 자신의 귀중한 생명을 자기 양 우리 안에 있는 양떼를 위해 내어놓는 것이다. 그러나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아직도 자신의 양 우리에 들어오지 못한 양들이 있어 못내 아쉬워하며, 그들의 방황을 안타까워하신다. 과연 누가 있어 그들을 주님의 양 우리로 데려 올 것인가? “주님,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불러 보내주십시오. 제가 그들을 데려오겠나이다.” 아멘.[◆박상대 마르코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