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8월16일(주일) - 연중 제20주일 > 복음 묵상

백삼위 한인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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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묵상

[] 2009년8월16일(주일) - 연중 제20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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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작성일 : 2009-08-15 조회수 : 2,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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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중 제20주일 (나해) [오늘의 복음] 요한 6,51-58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52) 그러자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5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54)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58)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복음산책] 우리가 식인종인가? 우리가 흔히 쓰는 말 중에 약간 섭섭하게 들리는 말이 있다면, 그것은 “난 널 빤히 다 알아!”라는 말이 아닌가 싶다. 한 사람이 상대방을 자기 손바닥 보듯이 빤히 다 알고 있다는 사실은 상대방의 어떠한 새로운 점도 이해하지 못하게 하는 선입견을 낳게 된다. 인간의 삶이란 무릇 약간 비밀스런 것이 있을 때 오히려 진지하고 생동감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라고 선포하셨을 때,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하며 예수님을 한낱 인간으로만 보려했던 유다인들에게 오늘도 자신의 살과 피를 영원한 생명을 위한 양식과 음료로 내어 주시는 주님의 초대는 계속된다. 예수님께 대한 유다인들의 반응이 호감에서 거부로 흘러가고 있는데도 말이다. 이 대목에서 요한복음서 6장이 기록하고 있는 예수님께 대한 군중의 호칭을 한 번 정리해 볼 필요가 있겠다. 빵의 기적이 있은 다음 날 호수 건너편 카파르나움에서 예수님을 찾아낸 군중은 “라삐, 언제 이곳에 오셨습니까?”(25절)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기 위해 하느님께서 보내신 자기를 믿으라고 했을 때 그들은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30절) 하며 기적을 청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생명을 주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빵을 운운하셨을 때 그들은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34절) 하고 청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내가 생명의 빵이다.”(35절)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41절)고 하신 말씀에 못마땅해 하며 수군거리는 반응을 보였다. 이 대목에서 ‘군중’이 ‘유다인들’로 지칭된다. 여기에서 유다인들의 불만은 ‘생명의 빵’보다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말에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42절) 하며 돌연 예수님께 대한 호칭을 바꿨다. ‘라삐’에서 ‘선생님’에로, 이어 그냥 ‘저 사람’으로 바뀐 것이다. 물론 마지막은 예수님께 대한 직접적인 호칭은 아니다. 자기네들끼리 수군거리며 하는 말이었다. 오늘 복음에서도 유다인들은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52절) 하면서 서로 말다툼이 벌였다. 이 반응을 미루어 볼 때 유다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다고 단정할 수 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전반적으로 어려운 데도 이유가 있지만, 이젠 ‘생명의 빵’이 ‘자기 살’이라는 말에 유다인들은 거의 구역질이 날 정도였을 것이다. 복음서의 기록에는 없지만 이 구절 다음에 “우리가 무슨 식인종이란 말인가?”라는 한 마디를 덧붙여 우리들 사고의 지평을 넓혀보자. 식인종(食人種)이란 사람을 잡아먹는 풍습이 있는 미개인종(未開人種)을 일컫는 말로서 카니발리즘(cannibalism)을 뜻한다. 우리는 통상 인육(人肉)을 음식(飮食)으로 먹는 개화(開化)가 덜된 인종들을 식인종이라고 알고 있다. 왜 식인종들은 인육을 음식으로 먹었을까? 일용할 양식이 부족했던 것일까? 아니면 적대자나 원수를 잡아 죽인 다음, 인육을 취하여 먹음으로써 그들에 대한 적개심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려했던 것일까? 인류문화사 계통의 학자들은 오랜 옛날부터 세계 각지에서 카니발리즘(cannibalism)같은 풍습이 행해진 것으로 추정한다. 미개한 인종들 사이에서 굶주림이나 복수, 종교의례나 효행 등의 이유에서였다고 하나, 비교적 높은 문화수준을 가진 종족에서도 가끔 제례의식과 관련하여 행해진 흔적이 있다. 카니발리즘은 대략 뉴기니 내륙지방, 서부 및 중앙아프리카, 멜라네시아, 폴리네시아,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의 마오리족, 수마트라의 바타쿠족, 남북아메리카의 여러 부족, 북극지방의 에스키모 등지의 역사에서 발견된다. 지역에 따라서 인육은 굶주림 때문에 실제로 음식이 되기도 하였고(북극지방 에스키모), 식품의 일종으로 간주되어 시장에서 매매되기도 하였으며(바타쿠족), 멜라네시아에서는 동물의 고기와 같이 취급되기도 하였다. 아프리카 여러 지역에서 빈번하게 나타나는 의례적 살인과 식인(食人)은 종종 사술(邪術)이나 요술(妖術)의 관행과 결부되었고, 병자(病者)가 그의 친족에 의하여 잡아먹히는 수도 있었다. 뉴질랜드 마오리족의 경우에는 승자(勝者)가 싸움에서 죽인 자의 살을 베어 승리의 축하잔치에 썼다고 한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일부에서는 영혼(靈魂)을 배당 받기 위해 죽은 사람의 인육(人肉)을 먹고, 그 뼈를 보존하는 풍습도 있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종교의 의례적인 의미에서 사자(死者)의 특정 부분 또는 내장 부분을 먹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먹은 사람은 사자의 영혼과 힘을 얻는다는 생각이 학자들의 통설(通說)이다. 결국 카니발리즘은 사자(死者)의 영혼(정신)과 힘을 이어받고자 자민(子民) 보호적 차원에서 행해진 종교적 관행이라는 말이다. 온갖 위험이 도사리는 밀림 한 가운데서 맹수나 적대자로부터 부족을 지키던 한 용사(勇士)가 목숨을 바쳐 죽었을 때, 그의 시체를 둘러싸고 부족의 사람들이 모두 모여 종교적 의례를 거행하였을 것은 매우 있을법한 이야기다. 이 자리에서 다음 용사가 죽은 용사의 인육을 취하여 먹음으로써 그의 부족을 위한 정신과 힘을 이어받는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살이 우리 육신(肉身)을 위한 양식이든 영혼(靈魂)을 위한 양식이든 간에 예수님께서 자기 살을 먹으라고 내어주시는 행위는 카니발리즘과 상당히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유다인들의 불평에도 아랑곳없이 예수님의 가르침은 강행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대한 믿음을 요구하실 뿐 아니라, 더욱 더 강하게 당신 몸을 먹고, 당신 피를 마실 것을 강조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양식이 되는 살뿐 아니라 음료로 자신의 피까지도 내어 주신다.(55절) 이로써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전부(全部)를 주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예수님을 먹는 사람도 예수의 힘으로 살 것이다.(56절)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사가가 제시하는 성체성사(聖體聖事)의 설정이다. 공관복음이 예수님께서 자신의 생애 마지막,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성체성사를 세우셨다는 사실을 보도하고 있는 반면(마태 26,26-30; 마르 14,22-25; 루카 22,15-20; 1고린 11,23-26),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공생활 한 가운데에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것으로 보도하고 있는 셈이다. 이 세상에 어느 누가 있어 자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내어줄 수 있겠는가? 그것도 단순한 육체의 배불림을 위한 한 끼의 식사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위한 영원의 양식으로 말이다. 하느님의 사랑뿐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더라도 육의 식인종이 아니라 사랑의 식인종일 수 있는 것이며, 그래서 또 다른, ‘제2의 그리스도(alter Christus)’가 되는 것이다.[◆박상대 마르코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