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2월22일(주일) - 연중 제7주일 > 복음 묵상

백삼위 한인성당
  • 복음 묵상

복음 묵상

[] 2009년2월22일(주일) - 연중 제7주일

페이지 정보

작성자 : 작성일 : 2009-02-20 조회수 : 2,117

본문

◉ 연중 제7주일 (나해) [오늘의 복음] 마르 2,1-12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1) 며칠 뒤에 예수님께서는 다시 카파르나움으로 들어가셨다. 그분께서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퍼지자, 2)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하셨다. 3) 그때에 사람들이 어떤 중풍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왔다. 그 병자는 네 사람이 들것에 들고 있었는데, 4) 군중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분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내려 보냈다. 5)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6) 율법 학자 몇 사람이 거기에 앉아 있다가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7) ‘이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8)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그들이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을 당신 영으로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9) 중풍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10)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다. 11)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12)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며 말하였다.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복음산책] 병과 죄의 관념적 유대 나병환자에게 직접 손을 대시며 외적인 깨끗함뿐 아니라 내적인 깨끗함을 베풀어주신 예수님께서는 며칠이 지나 다시 카파르나움으로 오셨다. 카파르나움의 집이라 함은 시몬 베드로의 집을 말한다.(마르 1,29) 아마도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지방의 복음선포를 위해 시몬의 집을 거점으로 삼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예수님께서 다시 시몬의 집에 오셨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졌고, 삽시간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문 앞까지 가득 찼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셨다. 마침 중풍병자 하나를 네 사람이 들고 왔으나 들어갈 수가 없음을 알고 지붕으로 올라가 지붕을 벗겨내고 구멍을 내어 예수님께서 계신 곳으로 병자를 내려 보냈다. 생각할수록 기막힌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더욱더 기막힌 것은 그렇게 내려 보낸 사람들의 믿음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그의 중풍을 고쳐주시는 대신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5절) 하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는 복음서가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들을 집약하여 보도하는 책으로 착각하면 큰일이다. 기적은 분명 놀라운 일이고 늘 같은 방식으로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에게 매력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께는 기적이 대수가 아니다. 마귀 들린 자, 나병환자, 오늘의 중풍병자 등 어떤 모양의 물리적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을 치유하는 일은 예수님에게 있어서 그리 큰 일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이런 일들을 계기로 더 큰 일을 생각하고 계신 것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오늘 복음에서 그것은 믿음과 용서로 나타난다. 기적을 베푸는 자는 예수님이시나 그 기적을 유발시키는 힘은 기적을 베푸는 자에 대한 믿음이다. 중풍병자를 들것에 들고 지붕까지 벗기면서 예수님께 내려 보낸 네 사람은 적어도 믿음에 있어서는 같은 마음이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쳐주실 수 있고, 또 고쳐주실 것이라는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왔으며, 들것에 실려 있는 병자도 같은 믿음을 가졌을 것이다. 그런데 그 믿음이 뜻밖에도 ‘죄의 용서’를 만나게 된 것이다. 죄(罪) 때문에 병(病)이 온다는 생각은 이미 구약시대에 널리 퍼져 있던 사실이다. 이는 어디까지나 그 시대의 생각이다. 오늘날 누가 아프거나 병에 걸렸는데 병원에 가지 않고 고해소를 찾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현대의 우리는 질병의 원인을 도덕적인 잘못에서 찾지 않는다. 그러나 고대의 사람들은 달랐다. 굳이 죄 때문에 병이 드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병의 원인을 죄에서 찾으려 했던 것이다. 구약의 율법이 온갖 악성 피부병을 ‘부정(不淨)’하게 본 것은 사실이다.(레위 13-14장) 레위기가 깨끗하지 못한 것을 죄라고 단정하지는 않았지만, 부정(不淨)함을 죄의 맥락에서 보았던 것이다. 욥기를 보아도 그렇다. 욥이 악마의 시험으로 죽을 피부병에 걸려서 갖은 고통을 받다가 결국은 자신을 죄인으로 고백하지 않는가?(욥 9,2.12.20) 예수님께서도 38년이나 앓아 누워있었던 중풍병자를 고쳐주시고는 “자, 지금은 네 병이 말끔히 나았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더욱 흉한 일이 너에게 생길지도 모른다.”(요한 5,14) 하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이렇게 볼 때 죄와 병은 결과론적은 아니라 할지라도 관념론적으로 한데 묶여 있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와 그를 데리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고 먼저 ‘죄의 사함’을 베푸신 것이다. 예수님께는 이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함께 그 장면을 지켜본 율법학자들의 머릿속에 예수님의 발언이 하느님을 모독한다는 생각이 든 것은 당연한 일이다. 땅위에서 죄를 사할 수 있는 권한은 오직 하느님에게만 속해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바로 죄 사함의 권한을 가지신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은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서라기보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병자의 행동에 의해 증명된다. 요를 걷어들고 걸어가는 병자의 행동은 병이 다 나았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곧 죄를 용서받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사람의 아들에게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10절) 그런데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한가? 율법학자들은 예수께 이러한 권한이 있다는 것을 한편으로는 의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두려워하고 있다. 사람들은 중풍병자가 죄를 용서받았다는 데는 관심이 없고, 중풍이 사라지고 요를 걷어들고 걸어가는 기적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 그들의 말대로 ‘이런 일은 정말 처음 보는 일’(12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중요하고 또 감사해야 할 일은 믿음이 용서를 만났다는 사실이며, 그래서 중풍병자가 죄를 용서받았다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바로 그 죄 사함의 권능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이다. 오늘날 웰빙(Well-being)시대를 사는 우리들 중에는 믿음으로 죄의 용서를 바라기보다는 건강한 육체나 어려운 경제적 형편이 좀 나아지기만을 바라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건강한 몸을 지녔다거나 경제적으로 잘 산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죄를 용서받은 사람만이 구원을 받을 것이다.[◆박상대 마르코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