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6월7일(주일) - 삼위일체 대축일 > 복음 묵상

백삼위 한인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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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6월7일(주일) - 삼위일체 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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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작성일 : 2009-06-06 조회수 :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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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위일체 대축일 (나해) [오늘의 복음] 마태 28,16-20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라.> 16)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17)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18)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복음산책] 삼위일체의 내적 원리 우리는 지난 일요일 성령강림대축일을 기념함으로써 50일간의 부활시기를 마감하였다. 이로써 교회는 한 해의 전례주년 속에서 가장 중요한 하느님의 구원업적을 기념하고 경축하였다. 교회는 대림시기, 성탄시기, 사순시기, 부활시기와 성령 강림절을 통해서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계획과 성자의 강생과 부활을 통한 실제적 구원성취, 그리고 성령강림을 통한 구원은총의 배분과 그 효과를 실제 눈으로 보듯 체험하였다. 이렇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 각 위격(位格)의 고유한 업적을 시기적으로 기념한 교회는 오늘 인류구원업적의 총체적 주체이신 하나이신 하느님과, 그러나 동시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 고유한 각 위격의 일치를 고백한다. 즉 삼위일체의 하느님을 고백하는 것이다. 성령강림으로 말미암아 진리의 성령을 선물로 받은 교회가 부활시기를 마치고 연중시기를 속계(續係)하는 첫 주일에 삼위일체의 하느님을 고백하는 것은 참으로 합리적이고 당연한 귀결이라 할 수 있다. 신학(神學)이 논하는 하느님 삼위일체(三位一體, Trinitas, de Deo uno et trino)의 신비는 겉으로 보기에 한 분이신 하느님은 그 안에 세 개의 위격을 지니고 계시다는 것이다. 철학적 신론(神論)의 성과는 존재하는 모든 것 중 최고의 절대자가 필히 존재한다는 것이며, 그 존재가 바로 하느님(神)으로서 유일신(唯一神), 즉 유일(唯一)한 존재라는 것이다. 신학적 신론은 철학적 신론의 성과인 유일신을 바탕으로 삼위격(三位格)의 하느님을 피력하였다. 하나이신 하느님에 대한 삼위격적 고찰(考察)은 순전히 예수님 덕분이다. 육화(肉化)된 말씀이신 예수께서 하느님 내적 생명의 원리를 알려주신 것이다. 예수님의 삼위격적 하느님에 대한 계시(啓示)는 예수께서 자신의 죽음으로 값을 치러 알려주신 것이다.(이 대목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요한복음을 잘 묵상하여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계시된 삼위일체를 “구원경륜적(救援經綸的) 삼위일체”라고 한다. “구원경륜적 삼위일체”는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계획(구약성서)과 실행, 사람이 되신 성자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구원성취, 성령을 통한 구원은총의 배분과 효과라는 전체적인 구원경륜(oeconomia salutis)의 역사를 통하여 계시된 셈이다. 구원경륜의 총체적인 역사를 통하여 드러난 삼위일체의 하느님은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부터 영원히 계셨던 바로 그 하느님과 같은 분이시다. 이 대목에서 신학적 신론은 “내재적(內在的) 삼위일체”를 언급한다. 내재적 삼위일체는 하느님의 원초적이고 본성적인 내적 삶의 구조이다. 따라서 구원경륜적 삼위일체는 곧 내재적 삼위일체이며, 내재적 삼위일체는 구원경륜적 삼위일체와 일치한다.(독일 신학자 칼 라너) 자신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삼위일체 하느님의 진리를 가르쳐 주신 예수님께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하느님께 나의 신앙을 고백하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 안에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 인간의 지식이 하느님을 완전히 파악하였다거나 깨달았다는 것이 아니다. 그 옛날 아우구스티노 성인도 그랬다. 고백록의 저자로 유명한 성인은 어느 날 바닷가를 거닐며 삼위일체의 신비를 이해하고자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성부, 성자, 성령이 각기 계시는데 어떻게 한 분이신가? 한 분은 낳으시고, 한 분은 낳으심을 받으셨고, 이 두 분에게서 성령이 발하셨다면 분명히 정도의 차이가 있을 것인데 어떻게 서로 높고 낮음도, 앞섬도 뒤섬도 없다는 말인가?’ 참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바닷가를 거니는데 한 아이가 해변 모래사장에 구멍을 내어놓고 조개껍질로 바닷물을 퍼서 그 구멍에 계속 갖다 붓고 있었다. 성인이 의아해하며 아이에게 물었다. “얘야, 거기서 뭘 하고 있니?” 그러자 아이는 “네, 지금 바닷물을 몽땅 이곳으로 옮겨 담으려 하고 있어요.”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성인은 “아니, 이 어리석은 아이야. 그 작은 조개껍질로 언제까지 저 바닷물을 그 안에다 옮겨 담겠다는 게냐?” 하며 아이의 무모함을 나무랐다. 그 아이는 “맞아요. 제가 하는 이 일이 불가능하듯 당신이 지금 생각하고 있는 문제도 해결하지 못할걸요!” 하고 말하고는 사라졌다고 한다. ‘삼위일체’는 어디까지나 세상을 창조하시고 모든 존재에 생명을 주시며, 스스로 사람이 되어 오시어 자신의 죽음과 부활로써 죄악의 늪에서 헤매는 인간을 구원해 주셨고, 구원받은 인간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때까지 거룩한 영의 힘으로 함께해 주시는 하느님에 대한 우리 인간 언어의 표일 뿐이다. 이는 마치 구름(clouds), 비(rain), 수증기(vapor)가 제각기 다른 모양을 하고 있으나, 물(H2O)이라는 본체로 구성되어 있음이다. 또는 태양(sun)이 모양(shape)과 열(heat)과 빛(light)을 내는 원리와도 비슷하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아들로, 그리고 성령으로 고백하며, 각 위격이 외적으로는 구별되지만 내적으로는 철저히 하나의 본성이라는 원리로 살아계심을 고백하는 것이다. 나아가 이 일치의 원리가 하느님의 내적 사랑과 남김 없는 자기증여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일치는 사랑에 의해서만 가능함을 우리는 안다. 무력이나 합의로 외적 일치를 도모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내적 일치는 오직 조건 없는 사랑과 남김 없는 헌신뿐이다. 가정과 공동체의 일치도 이와 다를 바 없다.[◆박상대 마르코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