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9년7월26일(주일) - 연중 제17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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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중 제17주일 - 나해 [오늘의 복음] 요한 6,1-15 <예수님께서는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원하는 대로 나누어 주셨다.> 1) 그 뒤에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 곧 티베리아스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는데, 2)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라갔다. 그분께서 병자들에게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3)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앉으셨다. 4) 마침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 5) 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6) 이는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 7) 필립보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 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8) 그때에 제자들 가운데 하나인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9) “여기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0) 그러자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곳에는 풀이 많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는데,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 되었다. 11)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 12) 그들이 배불리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13) 그래서 그들이 모았더니, 사람들이 보리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 14)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말하였다. 15)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복음산책] 한 어린아이의 전 재산 우리는 지금 연중시기 나-해를 보내고 있다. 나-해 연중 주일들의 복음은 규정상 마르코복음이다. 그러나 마르코복음이 다른 복음서에 비해 그 분량이 적은 전체 16장으로 편집되어 있기 때문에 오늘 연중 제17주일부터 연중 제21주일까지 다섯 주일 동안 요한복음 6장을 나누어 듣게 될 것이다. 참고로 가-해 연중 주일들에 봉독되는 마태오복음은 전체 28장, 다-해 연중 주일들에 봉독되는 루카복음은 전체 24장이다. 성경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요한 20,30) 목적으로 쓰인 책이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우리가 현재 누리고 있는 지상의 생명이 아니라 주님의 부활이 마련한 새로운 차원의 생명, 즉 영원한 생명을 뜻한다. 요한복음 6장은 인간이 지상에서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는 매일 섞어 없어질 빵을 필요로 하지만,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다른 빵이 필요하다는 것(성체성사)을 가르친다. 요한복음 6장은 앞서간 5장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고 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벳자타 못가의 중풍병자를 치유하자, 유다인들의 예수님의 권한에 시비를 걸어 논쟁을 벌이는 5장 전체의 내용이 예루살렘을 배경으로 보도되고 있는 반면, 6장의 내용은 갈릴래아 호수와 이에 인접한 카파르나움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5장과 6장 사이에 병자들을 치유하신 예수님의 행적이 생략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병자들에게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고 많은 군중이 예수님을 따라갔다는 6장 2절의 내용으로 증명된다. 상당히 긴 대목의 요한복음 6장은 구조상 대략 6단락으로 구분된다. ① 제1단락: 예수님께서 보리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000명을 먹이는 기적을 행하신다.(1-15절) ② 제2단락: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 위를 걸어서 배를 타고 있는 제자들에게 다가가신다.(16-21절), ③ 제3단락: 군중이 호수 동편에서 카파르나움으로 이동한다.(22-24절) ④ 제4단락: 예수님께서 생명의 빵에 대한 가르침을 대화형식으로 내리신다.(25-59절) ⑤ 제5단락: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많은 제자들이 불신을 토로하자 예수님께서는 배신자를 예고하신다.(60-66절) ⑥ 제6단락: 시몬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하여 신앙을 고백하자 예수님께서는 12사도 중에도 배반자가 있음을 예고하신다.(67-71절) 오늘의 복음은 6장의 제1단락에 속하는 대목으로서 생명의 빵에 대한 가르침을 준비하는 과정으로 빵의 기적(표징)을 보여주고 있다.(1-15절) 갈릴래아 호수 근처에 많은 군중이 떼를 지어 예수님을 따른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치유하는 기적을 보았기 때문이다. 아마 그들은 하루 종일 예수님을 따라 다닌 것 같다. 조그만 산등성이에 이르러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자리를 잡자, 그 주위로 무려 5,000명이 넘는 군중이 모여 앉았다. 유다인들의 가장 큰 축제인 과월절이 다가오고 있다는 언급(4절)은 조상들의 이집트 탈출과 광야생활을 암시하면서 어린양과 만나를 상기시킨다. 다들 지치고 굶주린 모습이다.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누가 어떻게 해 주었으면 하는 눈치들이다. 예수님께서 먼저 말을 꺼내셨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5절) 물론 불가능함을 알고 필립보에게 하신 말씀이다. 돈도 없고, 그만한 양의 빵을 살 곳도, 파는 곳도 없다. 단지 한 조각의 빵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 어치의 빵도 부족하다는 것이 필립보의 판단이다.(7절) 일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다. 예수님께서 다시 한 번 제자들과 군중들을 두루 살펴보신다. 그러자 사람들은 제각기 자기 허리춤을 움켜쥔다. 무엇이 잡히는 모양이다. 그 당시 사람들은 통상 길게 내려 입은 겉옷 속에 전대(纏帶: 돈이나 물건을 넣어 허리에 차기 위해 무명이나 베 따위의 헝겊으로 만든, 중간을 막고 양끝을 튼 긴 자루)를 차고 있었다. 그 속에 며칠 먹을 빵이 들은 게다. 그들은 집을 나설 때 누룩 없이 납작하게 만든 빵(무교병)을 몇 개씩 전대에 넣어 다녔다. 그냥 먹어도 되고, 쨈을 발라먹으면 맛이 그만이다. 하루 종일 예수님을 따라다니다 보니 준비해 온 빵을 다 먹어버린 사람도 있고, 아직 남아 있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서로의 얼굴만 쳐다볼 뿐, 누구하나 선뜻 자기 것을 내어놓으려 하지 않는다.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가 용케도 보리빵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어린아이를 지목한다. 아이가 자기 생명과도 같은 양식을 잘못 간수한 것인가? 아이의 작은 체구 때문에 허리춤이 불룩해서 안드레아에게 들킨 것인가? 아니면 순수한 아이 마음이 자기의 것을 몽땅 식사의 음식으로 내어놓은 것인가? 어떻게 된 것인지 자세히 알 수는 없는 일이다. 여하튼 어린아이의 전 재산과도 같은 빵 5개와 물고기 2마리가 예수님의 손에 건네어진다. 예수님께서 빵과 물고기를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다. 아마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올리셨을 것이다. 복음서는 그저 ‘감사를 드렸다’고 하지만 분명 이 감사는 사람들의 심금(心琴)을 울리는 기도였을 게다. 기도를 마치신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렀던 눈으로 사람들을 살펴보신다. 삼삼오오 둥글게 모여 앉은 군중들 가운데 빵도 마른 물고기도 수북이 쌓여있다. 모두가 배불리 먹는다. 여기저기서 이야기소리가 끊이지 않고 이따금 한바탕 웃음소리도 들린다. 그야말로 즐거운 잔치가 벌어진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전체 상황을 미루어 볼 때 충분히 있을 법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복음서는 오늘의 사건이 분명히 기적임을 밝히고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빵의 기적을 현장에서 분명히 체험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두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이시다.”(14절) 하고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눈빛은 달랐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눈빛에서 이런 기적을 보인 당신을 정치적인 ‘메시아 왕’으로 삼으려하는 낌새를 알아보셨다.(15절) 그것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행한 표징의 참 뜻을 깨닫기에는 부족했음을 의미한다. 사람들의 욕심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욕심이 앞서고 신(神)의 표징이 곡해되는 곳에 더 이상의 가르침은 없다. 예수님께서는 일단 그들을 피해 혼자서 산으로 가셨다. 사람들이 시간을 가지고 가르침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길 바라시는 것이다. 문제는 일용할 양식이 아니라 생명의 양식이기 때문이다.[◆박상대 마르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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