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9년8월30일(주일) - 연중 제22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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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중 제22주일 (나해) [오늘의 복음] 마르 7,1-8.14-15.21-23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고 있다.> 1)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왔다가, 2) 그분의 제자 몇 사람이 더러운 손으로, 곧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다. 3) 본디 바리사이뿐만 아니라 모든 유다인은 조상들의 전통을 지켜, 한 움큼의 물로 손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으며, 4) 장터에서 돌아온 뒤에 몸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 이 밖에도 지켜야 할 관습이 많은데, 잔이나 단지나 놋그릇이나 침상을 씻는 일들이다. 5)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을 두고 옳게 예언하였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7)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8)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14)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군중을 가까이 불러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15)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21)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22)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23)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복음산책] 진실로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 오늘 복음은 그 동안 뜸했던 예수님과 바리사이파 계층의 율사들 사이의 논쟁이 다시 시작됨을 알린다. 마르코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의 공생활 초기에 이미 여러 번의 논쟁들이 있었다. 첫 번째 논쟁은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 주변 동네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당시 ‘죄인으로 취급받던’ 레위를 부르신 후 그의 동료들과 함께 식사를 나눈 일로 바리사이파 율사들이 예수님을 ‘죄인들과 어울려 먹고 노는 작자’로 단정해버린 것이다. 그에 이어 단식논쟁이 있었고, 안식일에 제자들이 이삭을 까먹은 일과 역시 안식일에 회당에서 손이 오그라든 환자를 치유한 일로 논쟁은 한층 격렬해져 바리사이들이 헤로데 당원들과 결탁하여 예수님을 제거하기로 결의하기에 이른다.(마르 2,13-28; 3,1-6) 그 이후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사들이 예수님이 베엘제불에 사로잡혔고, 마귀두목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고 모함한 적도 있다.(마르 3,22) 그런데 오늘 논쟁이 이전의 논쟁에서와 다른 점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님과 논쟁을 벌일 작정을 하고 예루살렘에서부터 몰려 내려왔다는 사실이다. 생각건대 갈릴래아 지방의 바리사이들이 예루살렘에 율사들에게 도움을 청하여 오게 한 모양이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께 몰려오자마자 예수님의 제자들 몇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을 목격한 것이었다. 나아가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음으로 인해 그들의 손을 ‘부정한 손’으로 판단하고 ‘죄인’으로 단정해 버린 것이다. 바로 이 일이 오늘 논쟁의 주제가 된 셈이다. 따라서 오늘 복음의 논쟁은 율법에 관한 것이 아니라 조상들의 전통에 관한 것이다. 예를 들어 정결에 관한 율법규정은 따로 있다.(레위 12-15장) 조상들의 전통이란 넓은 의미로 볼 때 율법의 범주에 속할 수도 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율법은 아니다. 여기서 전통이란 율법을 확대하여 생겨난 관습(慣習)이나 인습(因習)을 말하는 것으로 조상 대대로 전해져 내려와 사람들의 몸에 배이거나 익은 것이다. 쉽게 말하면 이는 일종의 ‘터부(taboo)’로서 그 사회에 줄곧 통용되는 ‘금기(禁忌)’이다. 터부는 통상 종교적 신성(神性)을 제고하거나 고양할 목적으로 사람의 생활태도, 행위, 언어, 사물 등 인간의 거의 모든 삶의 영역에 묶어둔 금기(禁忌)를 말하는 것이다. 마르코복음 7,1-23에는 유다인들의 조상전통에 속하는 정결관습, ‘코르반’ 관습, 그리고 금기 식품에 관한 관습이 언급되고, 이 세 가지에 대한 철저한 비판과 함께 예수님의 새로운 해석이 내려진다. 오늘 복음에는 정결관습과 금기 식품에 관한 관습이 그 논쟁의 주제가 되었다. 율사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정결관습을 어겼다 하여 예수님께 시비를 건 것이다. 그러나 이런 관습에 대한 예수님의 입장은 단호하다. 사람이 만들어 낸 전통과 관습을 마치 하느님의 것인 양 가르치고, 이를 어기는 사람들을 죄인으로 취급하며, 이를 핑계 삼아 하느님의 계명과 그분의 뜻을 무시하지 말라고 엄중히 타이르신다. 결론은 간단하다. 인습, 관습, 터부, 금기 등을 지키는 일이 우선적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일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중에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일, 사람들이 군집한 시장이나 공공장소에서 돌아와 몸을 씻는 일, 음식을 담기 전에 그릇들을 씻는 일을 놓고 이 일들을 하지 않으면 종교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부정(不淨)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거나 하지 않아도 무방하며, 하지 않으면 단지 위생상 불결할 수 있다고 여길 것이다. 다도(茶道)가 복잡하지만 정신수양에 도움이 되고 나름대로의 멋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그러나 차를 마시는 규칙이 하느님을 섬기는 일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서(29,13)를 인용하여 그들이 율법만큼 중요시하는 조상의 전통을 ‘사람의 계명’(7절), ‘사람의 전통’(8절)이라고 단언하셨다. 즉 사람들이 만들어낸 관습에 불과한 것을 율사들은 하느님의 계명인 양 내세운 것을 질타한 것이다. 따라서 사람이 만든 조상의 전통은 하느님을 섬기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아가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지 않은 행동이 율법 상의 정결을 깨뜨린 부정함의 행동이 되어 그 주체가 죄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와 율사들, 그리고 주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가까이 불러 모아놓고 정결에 관한 율법을 다시 세워 주신다. 즉, 사람을 더럽히고 진정 하느님 앞에 부정(不淨)함이 되는 것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임을 선포하신다.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15절) 이 말씀으로 신약의 새로운 “정함”과 “부정함”의 율법이 세워졌다. 사람의 몸으로 ‘들어가는 것’은 어느 것도 사람을 더럽히지 못한다. 이것으로 구약에 불결하다 하여 금기한 음식들은 (레위 11장; 신명 14,3-21) 모두 폐기된 셈이다. 사실 유다인들에게 굽이 두 쪽으로 갈라지고 새김질하는 짐승들, 정(淨)한 새들과 곤충들, 그리고 비늘과 지느러미를 가진 물고기들 외에 다른 동물은 거의 부정한 것이어서 식용(食用)이 금지되었다. 그나마 식용이 가능한 것도 주검에 닿으면 다 부정한 것이 되어 먹을 수 없었다.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서 주식으로 삼았던 메뚜기(마태 3,4; 마르 1,6)는 식용으로 허용된 곤충(레위 11,22)이었다. 아무튼 예수님께서는 모든 금기 식품을 단 한마디 말씀으로 폐기해 버리셨다. 자연 그대로의 모든 음식물이 명예를 회복하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과연 사람을 더럽히고 하느님 앞에 부정함이 되는 것인가? 그것은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생략된 부분(16-20절)을 감안하면 여기까지가 바리사이와 율사들, 그리고 군중이 들은 말씀이다.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물러갔을까? 대변(大便)을 생각했을까? 진정으로 더럽히는 것에 대한 설명은 제자들에게만 허용되었다. 어떤 음식이든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마음속으로 파고들지 못하고 대변이 되어 배설되고 만다. 마음에서 나와 자신을 더럽히고 나아가 타인까지 더럽힐 수 있는 부정(不淨)한 것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으로서 온갖 ‘나쁜 생각들, 즉,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들이다.(21-22절) 이는 곧 예수님께서 제시하시는 죄악의 목록이다. 온갖 정결규정을 동원하여 ‘껍데기’만 가지고 백성들의 정함과 부정함을 판단하던 율사들은 자신들이 내뱉은 말 때문에 도리어 부정하게 되고 말았다. ‘정함’과 ‘부정함’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새롭게 세우신 규정은 남이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타인이 볼 수 없는 자신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무엇인지는 본인 스스로가 가장 잘 알 수 있지 않는가? 사람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데는 다소의 관습과 규정과 법칙이 필요하다. 더욱이 다수의 보편적인 이익을 위해 다양한 종류의 법이 존재한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도 교회법이 존재하고, 그 보다 더 중요한 십계명과 ‘사랑의 이중계명’이 존재한다. 아무리 많은 법이 존재하고 그래서 우리 공동체가 복잡하다 해도 제일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하느님을 섬기는 깨끗한 사랑의 마음이다. 그 마음을 먼저, 그리고 항상 표현하는 일이 제일 중요한 것이다. 사람의 생각과 마음에서 나오는 가장 먼저의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물을 바라보고 대하는 ‘표현’, 즉 ‘표정’이나 ‘말’이다. 아름답고 상냥한 표정이나 말 한마디가 천 냥 빚을 갚을 수도 있고,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 그러니 사물과 타인에게 보이고 던지는 표정과 한마디의 말이라도 사랑과 깨끗함을 담아 건네 줄 수 있어야 하겠다.[◆박상대 마르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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