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9월6일(주일) - 연중 제23주일 > 복음 묵상

백삼위 한인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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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묵상

[] 2009년9월6일(주일) - 연중 제23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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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작성일 : 2009-09-05 조회수 : 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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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중 제23주일 (나해) [오늘의 복음] 마르 7,31-37 <예수님께서는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셨다.> 31) 예수님께서 다시 티로 지역을 떠나 시돈을 거쳐, 데카폴리스 지역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갈릴래아 호수로 돌아오셨다. 32) 그러자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33)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34)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35)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36)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분부하셨다. 그러나 그렇게 분부하실수록 그들은 더욱더 널리 알렸다. 37) 사람들은 더할 나위 없이 놀라서 말하였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 [복음산책] 에파타! 마음과 귀와 입을 열어라. 오늘 복음은 그 서두에 예수님의 이방인 지역 선교에 관하여 짤막하게 언급하고 있다. 갈릴래아를 떠나 이방인 지역 티로에 가신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북쪽으로 약 36Km 더 떨어진 항구도시 시돈에 들르셨다가 데카폴리스를 거쳐 다시 갈릴래아 호수로 돌아 오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방인지역 선교여행이 이렇게 단 한마디로 요약될 그런 사안은 분명히 아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 이방인 지역인 티로에서 시돈으로 가셨고, 시돈에서 데카폴리스 지방으로 가시자면 골란과 바타네아 지방을 거쳐 남쪽으로 가셨을 것이고, 데카폴리스에서 다시 갈릴래아 호수까지 오셨다면 이 장정(長程)은 아무리 짧아도 150Km 정도의 먼 길이다. 예수님께서 대장정의 이방인 선교여행 끝에 도달한 곳은 다시 갈릴래아 호수였다. 추측컨대 이곳은 갈릴래아 호수 동편 골란 지방과 데카폴리스 지방의 접경 지역이었을 것이다. 그곳은 얼마 전에 예수님께서 ‘부대’라는 마귀를 쫓아내고 그 마귀들을 돼지들에게 들여보냄으로써 그들이 떼죽음 당했던 게라사(게르게사) 마을(마르 5,1-20 참조) 근처였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넓은 이방인 지역을 여행하시면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는 정확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두말할 필요 없이 하느님나라의 복음선포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 효과 역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그리 탐탁치가 않았을 것이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과 같은 믿음을 다른 어떤 곳에서도 보실 수 없었다는 말이다.(마르 7,24-30 참조)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서 바리사이파 율사들과 ‘정결’에 관한 논쟁을 벌이셨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전통을 고수하기 위해 하느님의 계명을 저버리는 그들이 참으로 야속하고 미웠을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잠시 떠나시려 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뜻밖에 티로에서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의 이교도였던 한 여인의 놀라운 믿음을 만날 수 있어 침통한 마음을 다소 푸셨을 것이다. 마귀에 들린 딸의 치유를 위한 그녀의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한 믿음이었고, 주위의 비웃음과 자신의 비참함을 알면서도 발원한 인내의 믿음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다.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하지만 그 여인은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응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하고 말씀하셨다.(마르 7,27-29) 이는 이스라엘에게만 약속된 것으로 알았던 하느님의 구원과 자비가 이방인에게도 선사됨을 알리는 순간이다. 하느님 구원의 현주소가 우선적으로 이스라엘을 향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스스로가 이를 거부하고 있었다. 물론 이스라엘이 구원을 간절히 원하고 애를 끊는 심정으로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지만, 하느님께서 보내실 구원과 메시아는 그들을 넘고 비켜서 이방인과 온 세상을 향하여 서서히 확장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오늘 복음이 전하는 ‘귀먹고 말 더듬는 반벙어리’의 치유는 단순한 치유사건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벙어리란 음성언어를 소리 낼 수 없는 사람인데, 음성언어를 소리 낼 수 있는 능력이 발달하지 못한 상태일 수도 있고, 이전에는 말을 할 수 있었으나 어떤 원인으로 그 능력을 상실한 경우도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듣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는 농아(聾啞)인데, 농아는 귀가 먹어 귀로 듣지 못하기 때문에 언어를 익히지 못해 말을 할 수 없게 된 사람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예수님께 데려와 치유를 청하는 귀먹은 반벙어리는 듣지 못하기 때문에 말하지도 못하는 사람이다. 귀먹은 반벙어리는 곧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듣는다고 해도 그 뜻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 즉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거부하는 사람들이다. 예나 지금이나 복음을 거부하는 모두를 향하여 예수님께서 외치신다. 그들의 마음과 귀와 입을 향하여 명령하신다. “에파타!”(열려라!)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향해 귀를 열고 마음을 열어야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그토록 간절히 원하시는 것이다. ‘에파타’는 비단 오늘 복음에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온 세상을 향한 간절한 소망으로서 ‘지금 여기에’만이 아니라 복음이 전해지는 모든 곳과 세상 끝 날까지 영원히 통용될 말씀이다. 귀먹은 반벙어리가 예수님의 은혜로 ‘들음과 말함’을 찾았다고는 하나 ‘들음과 말함’이 예수님의 뜻과 부합되지 않을 때는 언제고 함구령(緘口令)이 내린다. 들어도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 엄한 함구령 다음에는 또 다른 효과가 있기는 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37절)라는 사람들의 경탄은 지극히 당연하다. 소경이 눈을 뜨고 귀머거리의 귀가 열리며 절름발이가 사슴처럼 기뻐 뛰고 벙어리도 혀가 풀려 노래하는(이사 35,5-6) 현실은 메시아 시대의 표징들이기 때문이다.[◆박상대 마르코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