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12월14일(주일) - 대림 제3주일 > 복음 묵상

백삼위 한인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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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묵상

[] 2008년12월14일(주일) - 대림 제3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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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작성일 : 2008-12-13 조회수 :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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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림 제3주일 (나해) [오늘의 복음] 요한 1,6-8.19-28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6)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7)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8)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19)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다.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었을 때, 20) 요한은 서슴지 않고 고백하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하고 고백한 것이다. 21) 그들이 “그러면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 하고 묻자, 요한은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그 예언자요?” 하고 물어도 다시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2) 그래서 그들이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우리가 대답을 해야 하오.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오?” 23) 요한이 말하였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24) 그들은 바리사이들이 보낸 사람들이었다. 25) 이들이 요한에게 물었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 26) 그러자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27)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28) 이는 요한이 세례를 주던 요르단 강 건너편 베타니아에서 일어난 일이다.◆ [복음산책] 주님은 태양이요, 요한은 달이다. 새로운 전례주년의 시작인 대림 제1주일의 주제가 성자의 성탄과 재림을 향한 ‘준비와 기다림’이었고, 대림 제2주일의 주제가 준비의 방편으로 선포된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통한 ‘회개’였다면 오늘 대림 제3주일의 주제는 ‘희망과 기쁨’이다. 오늘 미사전례의 시작에서 “기뻐하여라.(Gaudete) 거듭 말하니,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여라.”(필리 4.4)고 외치는 입당송의 환호처럼 오늘 주일은 ‘가우데테(Gaudete) 주일’이라 불리기도 한다. 그래서 오늘은 대림환의 세 번째 장밋빛 초를 밝히며, 사제 또한 희망과 기쁨을 뜻하는 장밋빛 제의를 입고 미사를 봉헌할 수 있다. 오늘 봉독되는 복음은 요한복음 서문(프롤로그, 1,1-18)의 일부분과 이 서문에 이어지는 세례자 요한의 증언에 관한 내용이다. 그리 길지 않은 요한복음 서문은 복음서 전체를 요약하고 있으며,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그리스도론을 정립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이토록 중요한 요한복음서 서문에 이미 세례자 요한의 이름이 언급되고 그의 사명이 드러나 있다. 요한은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위해 앞서 보내신 사자(使者)이며, 그의 임무는 세상에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일이다. 요한복음 서문은 세상의 모든 존재가 하느님과 함께 한처음부터 계셨던 ‘말씀’으로부터 생명을 받았고, 이 말씀이 곧 생명이요 빛이며, 그 빛이 세상에 왔으나 암흑으로 가득 찬 세상이 이 빛을 깨닫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러니 이 빛을 증언하라고 하느님께서 요한을 보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생명이요 빛이신 그리스도는 영원히 빛나는 ‘태양’이며, 이를 증언하도록 파견된 요한은 태양이 없으면 빛을 낼 수 없는 ‘달’과도 같은 존재이다. 태양이 세상에 와 이미 비치고 있으나 어둠으로 가득한 세상이 이를 깨닫지 못하니, 요한의 사명은 태양으로부터 빛을 받아 이 빛을 증언함으로써 사람들을 믿음에로 인도하는 것이다. 이는 곧 요한복음의 저술목적인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요한 20,31)과 같은 맥락이다. 이로써 요한의 신원(identity)과 사명(mission)은 뚜렷해졌다. 그 외에도 요한은 이미 사제계급에 속하는 즈카르야의 아들로서 이론 가문의 혈통이다. 그러나 요한은 이 혈통에 머물지 않고 약관의 나이에 집을 나가 광야에서 금욕생활을 하였고, 급기야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부르짖기 시작하였다. 누가 봐도 요한을 약속된 메시아로 착각할 수 있는 대목이다. 요르단 강 주변은 물론이고 온 예루살렘이 이 사태를 묵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부터 사제들과 레위인들이 세례자 요한에게 파견된다. 이 백성의 지도급 인사들은 요한에게 두 가지 의도의 질문을 던진다. 하나는 세례자 요한의 정체성에 관한 심문 성격의 질문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베푸는 표징, 즉 세례의 의미에 관한 질문이다. “당신은 누구요?”라는 첫 번째 질문에 대하여 요한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은 그리스도(메시아)가 아니라고 증언한다. 나아가 엘리야도 아니고, 또 이스라엘이 기다리는 어떤 예언자도 아니라고 분명히 밝힌다. 요한의 활동을 지켜본 사람들은 충분히 그가 그리스도(메시아)일 수도 있으며, 아니면 메시아 이전에 오게 될 특사(말라 3,1)나, 아니면 야훼께서 나타나실 무서운 날을 앞두고 파견될 엘리야(말라 3,23-24)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에 요한은 자기가 이들 중 어느 누구도 아니라고 증언하였던 것이다. 요한은 지극히 겸손하게 어쩌면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결국 요한은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23절)고 자신의 신원을 밝힌다. 요한은 이렇게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분명히 밝힘으로써 오히려 자신의 증언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게 된다. 요한의 증언임무는 자기 자신과 이미 와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를 명확한 대비구조 안에 성립시키는 것이다. 이 대비구조는 [요한↔예수], [소리↔말씀], [선구자↔메시아], [종↔주인], [무(無)↔전부(全部)], [태양↔달] 등으로 표현될 수 있다. 이렇게 요한은 자신을 철저하게 비하시켜 이미 와 계신 그리스도를 최대한 앞으로 부각시킴으로써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게 되고, 나중에 예수님으로부터 엘리야(마태 11,14; 17,12; 마르 9,12-13)로 인정받고, 여인의 몸에서 태어난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자(마태 11,11)로 격상되는 등 임무에 투철하고 충실했던 사자(使者)의 정체성을 인정받게 된다. 둘째로 세례자 요한 자신이 우선은 아무 것도 아니면서 “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25절)라는 지도자들의 질문에 요한은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26절)고 대답한다. 요한이 물로 베푸는 세례는 분명히 죄의 용서를 위한 세례이다.(마르 1,2-3) 이는 앞서간 요한복음 서문과의 관계에서 볼 때 빛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는 첫째 조건이다. 사람들이 빛이신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죄의 회개와 용서를 위한 세례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요한 스스로는 빛이 아니기 때문에 이 빛을 증언하는 자로서, 사람들이 빛에 대한 믿음을 가지는 표징으로 죄의 용서를 위한 세례를 베푼다는 것이다. 죄의 용서를 위한 세례는 당시 이스라엘에서 피지배층의 백성들에게는 놀랍고 기쁜 소식으로 환영받았을 것이지만 지배층의 인사들에게는 신권(神權)을 침해하는 반역으로 간주될 수도 있었다. 그것은 구약에서 죄의 용서는 오직 속죄 제사를 통해 가능했기 때문이다.(레위 4-5장 참조) 요한이 베푼 물의 세례는 그리스도교의 세례성사와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그는 오직 물로써만 세례를 베풀었지만, 그리스도교의 세례는 물과 성령으로(요한 3,5) 이루어진다. 요한의 세례는 회개와 죄의 용서를 가져오는 세례로서 도래하는 하느님나라의 준비를 위한 것이지만, 그리스도교의 세례는 하느님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는 의미로 발전된다. 아무튼 세례자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 모두를 ‘빛’이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해야 할 사명을 가지고 활동하지만, 처음부터 이스라엘의 지도층 부류는 보고도 보지 못한, 듣고도 깨닫지 못하는 반대자의 편에 선다. 이로써 그들과 오시는 예수님 사이에 벌어질 끊임없는 갈등과 분쟁이 벌써부터 예고된다. 이어서 요한은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어 주실 분이 이미 우리 가운데 와 계심을 증언한다. 시간상으로는 자기 뒤에 오실 분이지만 자신은 그분의 신발 끈조차 풀 자격이 없다고 한다. ‘이미 오셨고’, ‘앞으로 오실 분’이 이미 우리 가운데 와 계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기쁨과 희망을 준다. 그러나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한다. 아직도 죄악의 어둠이 빛이신 그분을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한만은 이미 와 계신 그분을 알아보고 증언한다.(요한 1,29-34) 그는 빛을 받아 빛을 전하는 달과도 같기 때문이다. 이제는 우리가 그분의 빛을 받아 전하는 달이 되어야 할 것이다.◆[박상대 마르코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