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4월11일(토) - 부활성야 미사 > 복음 묵상

백삼위 한인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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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묵상

[] 2009년4월11일(토) - 부활성야 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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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작성일 : 2009-04-11 조회수 :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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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 부활 대축일 (부활성야 -나해) [오늘의 복음] 마르 16,1-7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는 되살아나셨다.> 1) 안식일이 지나자, 마리아 막달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무덤에 가서 예수님께 발라 드리려고 향료를 샀다. 2) 그리고 주간 첫날 매우 이른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에 무덤으로 갔다. 3) 그들은 “누가 그 돌을 무덤 입구에서 굴려 내 줄까요?” 하고 서로 말하였다. 4) 그러고는 눈을 들어 바라보니 그 돌이 이미 굴려져 있었다. 그것은 매우 큰 돌이었다. 5) 그들이 무덤에 들어가 보니, 웬 젊은이가 하얗고 긴 겉옷을 입고 오른쪽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깜짝 놀랐다. 6) 젊은이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놀라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그래서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보아라, 여기가 그분을 모셨던 곳이다. 7) 그러니 가서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렇게 일러라. ‘예수님께서는 전에 여러분에게 말씀하신 대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 [복음산책] 부활 성야(聖夜)의 원초적 표징들 성토요일을 비추던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고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면 교회는 바빠진다. 모두가 주님의 부활을 맞이할 준비로 분주해 지는 것이다. 정해 놓은 시간이 되면 성당의 불도 모두 끄고 화로의 숯불만이 깜깜한 밤을 밝힌다. 어둠을 밝히는 것은 오직 빛이요, 죽음을 이기는 것은 오직 생명이다. 빛과 생명의 잔치, 이것이 오늘 성야(聖夜)전례의 핵심이다. 오늘 성야는 성토요일이 전하는 무언(無言)의 메시지가 성취되는 밤이다. 일 년 365번의 밤들 중에 가장 거룩하고 성대한 밤이다. 예수님께서 어둠을 뚫고 빛으로, 죽음을 이기고 생명으로 부활하신 밤이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부활성야 예식을 함께 치러본 사람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 왜 ‘부활신앙’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예수 부활 대축제의 성야(聖夜) 전례는 많은 원초적이고 본질적인 표징들로 가득하다. 빛과 어두움, 죽음과 생명, 물과 불, 말씀과 응답, 빵과 포도주 등이 바로 그것이다. 세상에 살아가는 사람이면 그 누구든지, 인종도 종교도, 대륙도 문화에도 관계없이, 구석기시대부터 현대의 문명에 이르기까지, 그 누구든지 이 자리에서 함께 부활대축제를 지낸다면 이런 표징들을 통하여 깨닫게 될 것이다. 여기에 인간실존의 가장 본질적인 물음과 그 해답이 있다는 것을. 그것은 우리가 던지는 인간실존에 대한 의미와 인식, 믿음과 사랑, 그리고 생명과 죽음에 관한 물음이며 그에 대한 해답이다. 우리는 인류가 있기 시작하면서부터 죽음과 생명, 물과 불, 빛과 어두움 등의 자연적 표징들이 바로 신적인 권위에 속하는 것으로 믿어졌고 숭배되어 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신들이 세상에 생명을 선사하고 또 앗아간다는 것을. 이러한 신들의 위엄은 인간의 숭배와 찬미의 대상이었으며, 동시에 온갖 두려움과 공포의 원인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러한 자연적인 표징들을 자신들에게 유익한 요소로 만들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주술이나 마술의 대상으로 이용하기 시작했지만, 곧바로 합리적인 경험과 이해를 바탕으로 그릇을 빚어 만들어 물을 모음으로써, 갈증을 식히고 더러움을 씻기 시작하였다. 인간은 또한 불을 잘 다스려 빛을 내어, 어두움을 몰아내며, 밤의 온갖 공포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몸을 데우는데 쓰기 시작하였다. 오늘날 우리는 더 많은 발명과 기술을 통하여 물을 모아 댐을 만들고 수영장을 만들며, 전기를 켜 어둠을 밝히며, 초를 만들어 손에 들고, 화약을 만들어 불꽃놀이까지 할 줄 아는 인간이 되었으며, 나아가 첨단의 유전공학과 의학기술을 통하여 생명과 죽음에 대한 임의의 조작도 할 줄 아는 인간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생명과 죽음은 물론이고, 물과 불, 빛과 어두움을 완벽하게 제어하지 못한다. 아직도 우리에게는 이들에 대한 불확실함과 공포와 두려움이 남아 있다. 우리가 뜻하지 않은 화염이나 화산폭발에 휩쓸리거나 홍수나 지진을 만나 생명을 잃을 때면 더욱더 그렇다. 자연의 위력은 이렇게 인간의 능력과 예지를 능가한다. 그것은 이 모든 것이 바로 창조주이신 하느님께 속하기 때문이다. 하느님만이 이 모든 것을 잘 다스리신다. 그분만이 불기둥을 세우시고, 홍해의 물을 갈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파라오 군대에게서 지켜주시며, 바싹 마른 바위에서 물을 내시어 그들의 갈증을 식혀 주신다. 그분만이 자신의 빛나는 모습으로 제자들을 눈부시게 하시며, 장님을 광명으로 밝혀주시며, 죽은 자를 무덤에서 이끌어 내어 생명을 주신다. 그분만이 빵과 포도주를 현존의 표징으로 삼아 우리 안에 거처하시며, 나아가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 되신다. 바로 그분이 오늘 죽음을 쳐 이기고 부활하시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이다. 우리가 손에 든 광명의 촛불로, 우리가 축성하는 생명의 물과 양식으로, 우리 안에 흐르는 잔잔한 사랑으로 진정 계신다. 이로써 나 이 인간은 죽을 몸이지만 영원히 살 것이며, 모든 것을 잃었지만 다 받았으며, 죄로 말미암아 몰골 없이 부패되었지만, 은총으로 성화 되었고, 비록 비천한 몸으로 이 땅 위에 태어났지만, 그분의 자녀로 축성되어 하늘 나라의 상속자가 된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이 여기 아래 비천한 곳에로 인간이 되어 오셨음 때문이며, 불편한 말구유에서 고통의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오직 성부의 뜻을 따른 성자의 순종 때문이로다. 하느님의 전지전능함이 인간의 무력함이 된 때문이며, 하느님의 부유함이 인간의 가난함이 되었기 때문이며, 생명이 죽음을 이겼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인간들이 가지는 자기중심적인 얄팍한 계산 따위나 인간이 불끈 쥔 주먹을 치켜 올리며 자랑하는 문명이기 따위는 설자리가 없다. 이는 인간이 한번이라도 파악하거나 이해할 수 있는 지평의 것이 아니라, 사랑과 믿음으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큰일을 해 주셨다. 주님의 오른손이 위업을 이루셨도다.”하고 고백할 일이기 때문이며, 죽음과 무덤을 극복한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과 영원한 생명에 우리도 참여할 것이라는 희망이기 때문이다.[◆박상대 마르코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