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4월12일(주일) - 예수부활대축일 > 복음 묵상

백삼위 한인성당
  • 복음 묵상

복음 묵상

[] 2009년4월12일(주일) - 예수부활대축일

페이지 정보

작성자 : 작성일 : 2009-04-11 조회수 : 2,065

본문

◎ 예수 부활 대축일 (낮미사 - 나해) [오늘의 복음] 요한 20,1-9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 1)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2)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3)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4)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5)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6)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7)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8)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9)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복음산책]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도다. 알렐루야! 교회는 어젯밤 부활성야의 장엄하고 성대한 전례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베푸신 놀라운 구원사건을 기념하였다. 오늘 주일부터 앞으로 50일간 이 부활 대축제의 기쁨은 계속될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크게 세 가지 의의를 제고하는 하느님 구원사건의 결론이다. 그 의의는 첫째, 죽음의 세력을 물리치시고 생명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길을 열어주셨으며, 둘째, 죄로 말미암아 세상에 들어온 온갖 고통과 죽음이 예수님께서 이를 겪으심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었으며, 셋째, 우리도 그리스도처럼 부활할 것이라는 믿음과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교회가 예수님의 부활을 이러한 의미로 정립하기까지는 제법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시간이 소요된 이유는 우선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복음서의 기록이 서로 일치하지 않다는 점에 있다. 그것은 부활사건이 우리 인간의 머리와 마음속에 쉽게 믿음으로 정립되지 못한 데 있으며, 부활에 대한 믿음이 인간 편에서 자력으로 얻기보다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개별적인 체험을 통해 이끌어주심으로써 선사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신 이후 빠르게는 30년, 늦게는 70년이 흘러 편집된 네 복음서를 자세히 비교하여 살펴보면 예수님의 공생활은 차제하고라도 그분의 부활사건에 대한 그들의 기록이 상당 부분 차이가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서로 일치하는 점도 많다. 우리가 복음서를 그때와 지금의 시공(時空)적 간격을 두고 대하기보다, 어느 복음서를 읽든 예수님을 따라 다니던 제자나 여인들 중 한 사람으로서 지금 그 자리에 있다고 생각하면 일치점은 더 많아진다. 어느 누가 되었든 그들 중 하나가 되었다고 생각하여 보자.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붙잡히실 때 모두 그분을 버리고 도망갔던 경험이 있다.(마태 26,56; 마르 14,50)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긴 후 그분이 대사제 카야파의 집으로 끌려가 수석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로부터 사형선고를 받는 것을 보고 뉘우치고는 은전 30닢을 성전 안에다 던져놓고 물러가서 목을 매달아 죽었다.(마태 27,3-5) 아니면 베드로의 말대로 그 부정한 삯으로 밭을 샀다가 거꾸러져 배가 터지는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였을 것이다.(사도 1,15-18) 유다의 말로에 대하여 다른 복음서들은 관심도 없다. 베드로는 심문을 받던 예수님 가까이에서 그 결말을 보고자 했으나 세 번이나 스승을 모른다고 부인했고(마태 26,69-75; 마르 14,66-72; 루카 22,54-62; 요한 18,15-18.25-27), 예수님의 사랑받던 한 제자는 다른 여인들과 함께 스승의 십자가 죽음현장에 배석해 있었다가 예수님의 어머니를 그때부터 모시게 된다.(요한 19,26-27) 확실한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고, 돌무덤에 묻히신지 사흘이 지났으며, 주간 첫 날 아침을 맞았다. 유다를 제외하고는 11제자는 아무런 대책 없이, 통탄과 후회 막급한 마음으로 두려움에 떨며 한 곳에 모여 있다. 이른 새벽 아직 어두울 때, 몇 명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여인들이 지난 금요일에 치러졌던 예수님의 장례가 너무 성의 없었다는 아쉬움에 향유를 준비하여 무덤으로 갔는데, 무덤을 막았던 돌은 굴러져 나와 있었고, 그 안에 있어야 할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다는 것을 알고, 즉각 사도들에게 알린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가 즉시 무덤으로 달려가 보았더니, 여인들의 증언대로였다. 대략 이런 부분들이 복음서의 서로 다른 기록 안에서 일치를 보이는 점들이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첫날 아침에 여인들과 제자들이 본 것은 결국 빈무덤뿐이었다. 즉 예수님의 시체가 온데간데없고 무덤이 비었다는 것이었다.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요한 20,8)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요한 20,9) 베드로와 제자들이 믿었다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아니라 무덤이 비었다는 것이다. 하기야 예수님께서는 생전에 이미 예고하신대로 부활하셨으니 아직 송장으로 무덤 안에 있을 리가 없다. 우선 빈무덤에서 싹튼 부활에 대한 믿음은 계속되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과 이에 대한 체험, 예수님 승천사건과 성령강림사건을 통하여 더욱 성장하고 성숙하여 간 것이다. 결국 제자들과 증인들의 남은 삶이, 다시 말해서 진리자체이신 예수님과 그분의 부활을 증거하는 사람들의 삶이 부활믿음을 완성해 주었다는 말이다. 예수부활에 대한 우리들의 믿음 또한 부활사건과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한 첫 제자들의 증언과 그들의 삶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들을 둘러싼 이 세상과 다음 세상은 과연 무엇에 근거를 두고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각자의 삶으로 세상에 선포하고 증언해야 할 과제이다. 우리는 성금요일에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기념하는 전례를 통하여 어떠한 욕설과 조롱도, 침 뱉음과 모욕적인 발언도, 무자비한 채찍질과 구타도, 살을 파고드는 아픔도, 나아가 인간 최대의 부정적인 체험인 사형선고와 그로 인한 죽음도 예수님의 인간적이고 신적인 사랑을 굴복시킬 수 없음을 보았다. 하느님의 사랑은 이렇게 죽음까지도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이신 것이다. 자기에게 모든 불리한 것을 참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 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 이루었다.”(요한 19,30)는 이 말씀을 마지막으로 인간 예수님은 고개를 숙이며 숨을 거두셨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신 순간, 공관복음이 공통적으로 보도하는 바에 따르면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폭으로 찢어졌으며,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보던 사람들과 백인대장은 예수님이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셨음을 고백하였다.(마태 27,51.54; 마르 15,38-39; 루카 23,45.47) 마태오는 그 순간 땅이 흔들리며 바위가 갈라지고, 무덤이 열리면서 잠들었던 많은 옛 성인들이 다시 살아났다는 사실을 추가로 보도하고 있다.(마태 27,51-52) 이들은 예수님의 죽음이 가져온 사건들이다. 사태는 분명히 돌변했다.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시는 순간, 그분이 원래 지니고 계셨던 신성(神性)이 그 모습을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제 세계의 역사에 또 다른 하느님의 자기계시가 시작되었다. 예수님의 죽음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가 드러난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패배가 아니라 죽음에 대한 승리의 사건이다. 이는 인류의 역사가 지금껏 누려보지 못했고, 앞으로도 누리지 못할 최대의 승리이다. 이는 죄에 대한 승리요, 죄로 말미암은 죽음에 대한 승리로서 곧 부활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다시 살아 나셨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어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다는 사건은 분명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는 일이었고, 유다인들에게는 비위에 거슬리고, 온갖 분노와 모욕을 불러일으킨 일이었지만(1코린 1,23), 예수님의 공생활 중 모든 가르침과 행동의 마지막 책임 있는 결론이 십자가상 죽음이라면, 오늘 우리가 자랑스럽게 믿고, 경축하는 예수님의 부활은 이 모든 것이 참되다는 것을 확증해 주는 사건이다. 그분이 일찍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5-26)는 말씀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는 말씀에 대한 확증이다. 따라서 그분의 부활은 우리의 믿음이 헛되지 않았음과 앞으로도 그럴 것임을 말해주는 것이며, 우리의 믿음과 희망이 죽음으로 끝나거나 죽음에 머물지 않고 살아 있는 자에 있다는 사실을 보증해주는 것이다. 참된 믿음이란 거짓에 뿌리를 둘 수 없다. 참된 믿음은 변할 수 없는 ‘진리’에 그 뿌리를 두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리심으로써 그분 삶의 내용뿐만이 아니라, 그분 자체가 진리임을 증명해 주신 것이다. 진리는 불멸한다. 죽을 수 없다. 만약 죽더라도 다시 살아나야 하는 것이 진리이다. 하느님께도 예수님께도 죽음은 없다. 그분은 부활이요 생명이기 때문이며, 이것이 곧 진리이기 때문이다. 하느님 편에서는 그렇다 치더라도, 죽어야 할 운명을 지닌 우리 인간들 편에서 진리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에 관한 믿음을 얻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네 복음서가 증언하고 있듯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던 ‘그 주간 첫날 이른 아침’에 이를 목격한 사람은 일단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확실한 것 두 가지는 안식일 이른 아침에 무덤을 찾아갔던 여인들이 예수님의 시신이 없는 빈무덤만을 보았다 것과 (두) 젊은이가 나타나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 그분은 되살아 나셨다.’(마태 28,5-6; 마르 16,5-6; 루카 24,5-6)는 메시지가 전부였다는 것이다. 결국 빈무덤과 이 메시지를 가지고 우리도 예수부활의 믿음에 도달하여야 한다는 결론이다. 그렇다면 이 믿음은 하나의 도전인 셈이다. 믿어지지 않는 것을 믿어야하는 도전이다. 이 도전이 비단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만 갑자기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첫날 아침부터 그랬다. 그러나 동시에 이 믿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끌어주시는 체험에 달려있다. 부활의 믿음에 대한 도전의 실마리는 이렇듯 빈무덤과 그 메시지이다. 이 메시지는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이 죽은 자 가운데 있을 수 없으므로 무덤이 비어있다는 것이며, 갈릴래아 활동시절에 세 번에 걸쳐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여 그 믿음에 이르도록 깨우치라는 것이다. 빈무덤을 최초로 목격한 여인들이 바로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님을 줄곧 따라 다녔던 여인들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루카 23,49) 이 여인들은 갈릴래아 시절부터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예수님과 함께 했던 사람들이었다. 안식일이 지나자마자 다음날 이른 새벽에 급하게 준비한 향료를 가지고 무덤에 갔던 이유도 ‘명절 준비일’과 ‘안식일 시작’ 때문에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과 함께 경황없이 치렀던 예수님의 장례(루카 23,50-56)를 송구스럽게 생각하여 보완하려 했던 것이다. 이렇게 그들은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 그 이상을 그분과 함께 하려 했던 것이다. 결국 이런 여인들에게 부활신앙의 은총은 주어진다. 제자들 또한 이러한 노력을 해야 했으며, 우리도 각자의 부활신앙이 갈릴래아와 빈무덤에서 시작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박상대 마르코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