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5월31일(주일) - 성령 강림 대축일 >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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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묵상

[] 2009년5월31일(주일) - 성령 강림 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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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작성일 : 2009-05-30 조회수 :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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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령 강림 대축일 (나해) [오늘의 복음] 요한 20,19-23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19)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21)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22)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복음산책] 복음선포는 우선 죄의 용서를 선포하는 일이다. 오늘은 성령강림대축일이다. 오늘로서 50일간의 부활시기가 그 막을 내린다. 우리는 부활시기 내내 요한복음을 묵상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며, 그 핵심의 알맹이가 영원한 생명임을 깨달았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유다인들의 대축제인 과월절(뻬샤흐)을 부활절로, 오순절(샤부옷)을 성령강림절로 지낸다. 유다인들에게 과월절이 이집트 종살이에서의 물리적 해방을 기념하는 것이라면, 부활절은 예수부활을 통하여 인류가 죽음으로부터 생명에로 해방되었음을 기념하는 것이다. 유다인들에게 오순절이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야훼의 율법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한 것을 기념함으로써 율법을 통한 물리적 해방의 영적인 지속(持續)을 의미한다면, 성령강림절은 성부와 성자께서 보내시는 진리이시며 보호자이신 성령을 통하여 예수님의 부활로 마련된 영원한 생명을 깨닫고, 선포하며, 실제로 살아감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성령강림절은 영원한 생명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으로서 성령을 통하여 이 땅 위에서 이미 영원한 생명을 위해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이제 오순절은 성령강림절이다. 성령강림은 부활의 완성이며 충만이다. 성령강림은 부활절의 열매로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비록 승천하여 오셨던 곳으로 가셨으나, 약속대로(마태 28,20) 예수님께서 믿음의 공동체 안에 머무는 지속적 현존(現存)의 보증(保證)이다. 그래서 성령강림은 부활시기의 마무리를 고하는 사건이 아니라 진정한 부활의 시작을 의미하는 사건이며, 진정한 의미에서 교회의 탄생일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지 사흘만의 부활하심과 발현하심, 40일간 지상에 체류하심과 승천하신 사건은 아무래도 스승 예수님의 산 증인들인 제자단(11제자와 여인 제자들)에 한정된 효과적인 사건이다. 이들은 단지 몇 명으로 조직된 소수의 집단이었고, 스승의 죽음에 직면한 이 집단의 태도는 차라리 조직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허술했다. 그들은 승천하시는 스승으로부터 지상 최대의 복음선포와 세상으로의 파견을 명(命)받았다.(마르 16,14-20; 마태 28,18-20) 마르코복음은 예수님의 승천직후 제자들이 사방으로 나가 복음을 전했다(16,20)고 하나 이 대목은 후기 편집에 해당한다. 당시의 정황을 미루어 볼 때 사명을 수행할 능력과 용기가 턱없이 부족했다. 어쩌면 루카복음의 기록대로 제자들은 “높은 데에서 오는 힘을 입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24,49)는 스승의 명령에 따라 “줄곧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는 일”(24,53)과 하늘의 능력을 기다리는 일로 소일(消日)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오순절이 되었을 때, 한곳에 모여 있던 제자들에게 성령이 내렸던 것이다. 그들의 마음은 성령의 은사로 가득 차 성령께서 시키시는 대로 밖으로 뛰쳐나가 여러 가지 외국어를 구사하며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사도 2,1-11) 성령을 듬뿍 받은 사도 베드로는 “유다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를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으며, 사도들이 모두 그 증인이다.”는 요지의 논리적이고 청산유수 같은 설교를 했고, 이 설교에 믿음을 얻은 사람들 중에 그 날에만 삼천 명이 세례를 받았다.(사도 2,14-42) 드디어 소수의 제자단에 한정되어 머물러 있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성령강림절은 세상을 향한 교회공동체의 탄생일이며, 동시에 제2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절인 셈이다. 오늘 성령강림대축일 낮미사의 복음은 부활 제2주일에 들었던 요한복음(20,19-31)의 첫 부분(20,19-23)이다. 이 대목의 서술적 시점은 예수님께서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셨던 그 다음 날이며(19절), 내용상으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과 제자들의 부활체험(20절)과 맥락을 같이한다. 이 대목을 오늘 성령강림대축일의 복음으로 선택한 이유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성령을 불어넣어 주심’과 ‘파견’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직접적으로 발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생전에 약속하신 대로(요한 14,16; 16,7) 아버지를 통하여 제자들에게 성령을 불어넣어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21절)고 말씀하신 후 제자들이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도록 그들에게 숨을 내쉬시며 “성령을 받아라.”(22절)고 하시면서 성령을 불어넣어 주셨다. 이어서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23절)고 말씀하셨다. 왜 예수님께서 성령을 받은 제자들에게 곧바로 이 말씀을 하셨을까? 이 말씀 안에는 성령을 받은 제자들이 죄와 용서에 대한 ‘자유처분권’을 가진 듯 엿보인다. 물론 죄에 대하여 ‘단죄(斷罪)’와 ‘용서(容恕)’를 선포할 수 있는 분은 하느님 성령뿐이다.(16,8-11 참조)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활동을 제자들의 활동 안에서 보시는 것이다. 즉, 성령의 보호자로서의 활동과 진리로서의 활동을 제자들의 증거행동과 복음선포활동을 묶어 두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신다. 세상은 누구인가? 세상은 바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고, 배척하였으며(요한 1,10-11), 예수님과 더불어 제자들을 미워하였고(요한 17,14), 결국에는 예수님을 죽였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은 그러한 세상을 위해 목숨을 바친 죽음이었다. 이제 제자들은 그 세상에로 파견된다. 따라서 제자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죄 많은 세상’을 ‘용서하는 일’이다. 용서 없이는 복음선포도 있을 수 없고, 구원도 없다는 것이다. 결국 성령강림은 예수님을 죽인 세상의 죄를 용서하는 사건으로 자리 잡는다. 물론 사도들이 용서의 능력을 가진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아 돌아가신 예수님의 영(靈)이신 성령께서 사랑의 용서를 베푸시는 것이다. 따라서 누구든지 성령의 은사를 받으면 예수님을 닮게 되는 것이다. 성령의 은사(恩賜, 카리스마)를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사도직과 신앙의 증인에로 불림을 받는다. 이는 세례성사를 통하여 받은 일반사제직의 성숙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신자들은 더욱 완전히 교회에 결합되며, 성령의 특별한 능력을 받아 그리스도의 참된 증인으로서 말과 행동으로 신앙을 전파하며 옹호할, 보다 무거운 책임을 지게 된다고 가르친다.(LG 11) 복음전파와 믿음의 수호(守護)는 신자의 의무와 책임인 동시에 복음의 증인으로서 가지는 권리이며 자랑이다. 성령의 은사는 하느님 성령께서 베풀어주시는 은총이다. 이는 ‘다시 거두어 가시지 않는(로마 11,29) 하느님의 선물 전체’를 뜻하기도 하며,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베풀어지고(로마 5,15-16), 또 영원한 생명이 되는(로마 6,23) 은총의 선물’이기도 하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은총으로 충만하게 하시고”(에페 1,6) 우리에게 “온갖 종류의 선물을 베풀어 주실 것”(로마 8,32)이다. 이 선물들 중에 첫째가는 것은 성령 자신으로, 성령은 우리 마음 안에 내려져서 우리 마음에 사랑을 심어 준다.(로마 5,5). 성령께서 베풀어주시는 은사에는 성령칠은(聖靈七恩; 이사 11,2-3), 하느님 나라의 건설과 공동체의 유익을 위한 9가지 봉사의 은사(1코린 12,8-10), 그리고 개인의 성화를 위한 9가지 열매의 은사(갈라 5,22-23) 등이 있다.[◆박상대 마르코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