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8년10월12일(주일) - 연중 제28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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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중 제28주일 (가해) [오늘의 복음] 마태 22,1-14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1) 예수님께서는 또 여러 가지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 “하늘 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3) 그는 종들을 보내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 4) 그래서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렇게 일렀다. ‘초대받은 이들에게,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어서 혼인 잔치에 오시오.′ 하고 말하여라.’ 5)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 6)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였다. 7) 임금은 진노하였다. 그래서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자들을 없애고 그들의 고을을 불살라 버렸다. 8) 그러고 나서 종들에게 말하였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9)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 오너라.’ 10) 그래서 그 종들은 거리에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다. 잔칫방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 11) 임금이 손님들을 둘러보려고 들어왔다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를 보고, 12)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 하고 물으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13) 그러자 임금이 하인들에게 말하였다. ‘이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14)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복음산책]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당장 입을 예복은 있는가? 오늘 복음은 마태오복음 20장부터 22장 안에 등장하는 네 개의 비유말씀 가운데 그 마지막 비유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성전을 정화하신 일(마태 21,12-17)을 두고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마태 21,23) 하며 대드는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그 대답으로 내어주신 세 개의 비유말씀, 즉 ① 두 아들의 비유(21,28-32), ②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21,33-43), 그리고 ③ 혼인잔치의 비유(22,1-14)의 마지막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권한’에 관한 해명을 듣고자 달려온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가히 놀라울 정도의 수준으로 세 개의 비유를 연이어 뿜어내셨다. 오늘 ‘혼인잔치의 비유’ 말씀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부분은 임금이 자기 아들의 혼인을 위해 베푼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제각기 변명과 이유를 둘러대고는 오기를 거부하자, 자기 종들을 거리로 내보내 아무나 불러들여 잔칫집을 가득 채우는 내용이다.(1-10절) 이 대목을 거듭 읽어보면 이스라엘의 역사와 딱 맞아떨어짐을 알 수 있다. 하느님께서 구약시대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당신의 구원계약을 알렸고, 신약시대에는 사도들을 통하여 이미 그 구원이 성취되었음을 알렸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귀를 막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으며,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들을 배척했고, 더러는 죽였다. 이에 대한 하느님의 정의로운 처사는 실제로 발생했다. 기원후 70년, 로마 군인들이 저항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육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불태우는 사건으로 드러났던 것이다. 그들이 구원받을 자격을 스스로 상실했던 것이다. 이렇게 이스라엘의 역사는 비극으로 끝나지만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분의 수난과 죽음을 통하여 새로운 구원역사의 문을 여셨다. 임금의 명을 받은 종들이 거리로 나가 아무나 잔치에 초대한다는 것은 유다인이나 이방인이나, 선인(善人)이나 악인(惡人)이나 할 것 없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어린양의 죽음으로 마련된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초대를 받았음을 의미한다. 둘째 부분은 임금이 손님으로 가득 찬 잔칫방을 둘러보려고 들어왔다가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집어내어 추방하는 장면이다.(11-14절) 이렇듯 길바닥에서 아무렇게나 초대해온 사람들로부터 ‘예복’을 운운하는 임금의 처사는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우리는 비유의 사실적 표현에서 눈을 떼어 비유의 우의적 표현으로 시선을 옮겨야 한다. 여기서 예복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외적 치장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합당한 내적 자질을 말한다. 이는 곧 예수님께서 복음을 통하여 내리신 갖가지 가르침으로 무장된 정신이다. 이 정신은 단순히 ‘굳게 마음먹음’이 아니라, 결심을 바탕으로 ‘실제로 행함’이요, ‘덕행의 열매’를 말한다. 교회는 거룩하나 그 안은 별의별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이는 종말에 이르기까지 그럴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종말이 오기 전에 ‘예복’을 잘 갖추어 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때가 되면 더 이상의 자비도 사랑도 배려도 없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비유말씀 안에 벌써 특이한 차이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앞서 간 두 번의 비유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비유말씀 중간에 청자들인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그러면 두 아들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마태 21,31),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마태 21,40) 하고 의견을 물으시면서 생각할 여유를 주시고, 마음을 바꾸어 올바른 길로 돌아올 기회를 주신다. 그러나 마지막 비유에는 예복을 갖추어 입지 못한 당사자에게 직접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12절) 하고 질책하시며 결단내시니 말이다. 이는 더 이상의 여유도 기회도 없는 마지막 엄중한 심판이다. 야훼 하느님의 계약에 불충실한 이스라엘의 역사를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도록 요약하고 하느님 구원의 오묘함을 드러내는 오늘 복음말씀은 그 참뜻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마지막 심판이 될 것이다. 모든 민족을 위해 하느님께서 당초부터 마련하신 구원의 잔칫상에 영광스러운 봉사의 사명을 수여 받은 이스라엘 지도자들에게 그만한 자격이 없다는 예수님의 심판은 다른 한편 새로운 선언을 의미한다. 이는 곧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결성된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들이 구원의 잔치에 초대 받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결국 만인을 위한 구원의 잔치에 부족하고 죄 많은 내가 초대받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초대에 응하여 그 잔칫상에 앉아 있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잔치에 합당한 예복까지도 갖추어 입어야 한다. 사람이 사는데 적지 않은 문제가 되는 것은 (흔히 남자들 보다 여자들에게 있어서 더 큰 문제가 되겠지만) 몸에 걸쳐야하는 옷 문제이다. 오늘 외출을 하는데, 파티에 가는데 어떻게 차려입고 가야할 것인가? 어떻게 입어야 남에게 잘 보일 것인가? 이런 저런 걱정으로 옷장을 뒤적거리고 거울 앞에 서기를 여러 번 할 것이다. 그러나 알아야 할 것은 남을 눈을 위해 다른 사람이 만든 예복이 아니라, 나와 하느님의 눈을 위해 내 영혼이 마련한 예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의 인생이 만들어낸, 나의 영혼이 입어야할 그런 예복인 것이다.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말하고 행했는가에 따라 만들어 지는 그런 천상의 예복, 사랑의 예복을 말이다. 아무 것도 아닌 나를 위해 죽음으로 마련한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오늘 당장 갖추어 입어야 할 예복은 있는가?◆[박상대 마르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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