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9년4월19일(주일) - 부활 제2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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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활 제2주일 (나해) [오늘의 복음] 요한 20,19-31 <여드레 뒤에 예수님께서 오셨다.> 19)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21)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22)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24)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25)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28)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29)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30) 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 31)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복음산책]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 교회는 부활 팔일축제의 마지막 날인 오늘 부활 제2주일을 ‘하느님의 자비(慈悲) 주일’로 지낸다. 당초부터 하느님은 무한한 사랑과 자비의 충만하신 분이이심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특별히 날을 정하여 이를 기념하고 감사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2000년 4월 30일 하느님 자비의 사도로 알려진 마리아 파우스티나 코발스카(1905~1938) 수녀를 성인품에 올리면서 특별히 하느님 자비를 기릴 것을 당부했고, 교황청 경신성사성은 그해 5월5일 교령을 통해 2001년부터 부활 제2주일을 하느님의 자비 주일로 지내도록 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파우스티나 수녀를 새천년기 첫 성인으로 선포하면서 부활 제2주일을 하느님의 자비 주일로 정한 것은 새천년을 맞이한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하느님의 자비라고 여겼기 때문이며, 이는 파우스티나 수녀가 그리스도로부터 받았던 계시에 근거한다. 교황은 이미 1980년에 발표한 회칙 「자비로우신 하느님」에서 물리적이고 윤리적인 악이 팽배한 세상이 대립과 긴장으로 치닫고 있음을 통탄하며 이에 직면하여 교회가 하느님의 크신 자비에 힘입어 그 자비를 관리하며 분배하는 요람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교황은 회칙에서 오늘날 인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엄정한 정의보다 사랑에 용서를 더한 자비임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으며, 분쟁과 폭력을 종식하고 모두가 사람답게 사는 세상, 하느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한없는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고 확산해 나가야 한다고 하셨다. 오늘 ‘하느님의 자비 주일’과 관련하여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는 인류구원의 역사를 견인하는 신/구약성경을 통하여 여실히 드러난다. 이는 성자 하느님의 강생과 구속사건 안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또한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내는 사건이다.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사건이야말로 진정 하느님께서 얼마나 자비로우신 분인지를 폭로한다. 예수님은 스스로 깨지고 망가져 형태조차 알지 못하고, 낮추고 꺾여 이마가 땅에 닿아 흙이 묻고서, 비우고 버려 아무 것도 남지 않는 분이 되시어, 멸망과 죽음밖에 다른 어떤 것도 벌어둔 것이 없는 우리 인간을 일으켜 세워주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채워주셨다. 이는 죽어야 한다는 역설(逆說)의 가르침을 부활로써 증명해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가 할 일은 벅찬 감동과 눈물로 이런 놀라운 일을 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드디어 자신을 제자들에게 보이시는 장면이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부활사건과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사화를 복음의 마지막 부분인 20장과 21장에 기록하고 있다. 요한복음 21장이 초대교회 안에서 제고되는 베드로의 역할을 교회론적이고 사목적인 측면에서 강조하기 위하여 추가로 편집되었다는 학자들의 통설을 따르면, 오늘 복음(20,19-31)이 요한복음의 종결부분이다. 20장은 모두 다섯 단락의 구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① 제1단락(1-10절): 빈무덤 사화를 통한 예수님의 부활사건. ② 제2단락(11-18절):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 ③ 제3단락(19-23절): 부활하신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한 첫 번째 발현과 성령을 주심과 파견의 말씀. ④ 제4단락(24-29절): 예수님의 첫 발현 때 그 자리에 없었던 제자 토마스의 불신앙과 이에 대한 예수님의 두 번째 발현과 토마스 사도의 신앙고백. ⑤ 제5단락(30-31절): 맺음말. 오늘 복음은 제3~5단락을 한데 묶어 놓았다. 각 단락이 보도하는 내용의 형식을 분석하여 본다면 제1, 2, 3, 4단락은 직접화법을 사용한 상황보도의 형식을 취하고 있고, 제5단락은 단순설명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전승사적 관점에서 본다면 제1, 2단락이 같은 전승에 속하고, 제3, 4단락은 앞선 부분(빈무덤 사화, 부활예수와 마리아 막달레나의 만남)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독자적 전승에 속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여기에 요한복음의 저자가 의도하는 복음저술의 결론이 들어있다고 볼 수 있다. 저자는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31절)이 복음서 저술의 목적임을 밝히면서, 이 목적을 토마스 사도의 불신앙이 신앙에로 전환되는 사건에 연결시키고 있다. 복음서 저자는 결국 토마스가 부활하신 예수님 앞에 토로(吐露)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28절) 이라는 신앙고백이 예수님을 직접 보지 않고도 복음말씀을 통하여 믿음을 가지는 모든 참 행복자의 신앙고백이 되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바로 그날 저녁에 그분은 유다인들이 무서워 문을 걸어 잠그고 모여 있는 곳에 발현하신다. 우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평화’를 기원하신다. 왜 첫 말씀이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는 것일까? 그것은 제자들의 복잡한 머릿속을 안정시켜 주시기 위함이다.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있음을 확인했던 제자들의 머릿속은 참으로 복잡했을 것이다. 도대체 예수님의 시신이 어디로 갔을까? 말씀하신대로 부활하신 것인가? 그날 밤, 스승을 버리고 모두 도망을 쳤던 그들인데.(마태 26,56; 마르 14,50) 수제자 베드로는 세 번이나 스승을 부인했고, 스승을 팔아 넘겼던 유다는 이미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유다인들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함, 제자들 사이의 불신과 의심으로 가득 찬 다락방에 예수님이 나타나신 것이다. 예수님의 발현에 대한 제자들의 어떤 반응이 있기 전에 예수님께서 먼저 그들에게 평화를 기원하신 것이다. 다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성령을 받아라.” 하신 말씀이다. 평화가 파견에 이어지듯이 성령을 받음은 곧바로 죄의 용서와 연결된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23절)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는 모든 이의 죄를 이미 용서했으니, 제자들 서로의 용서는 그들에게 달려 있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에서 당신의 피를 통해 모든 이의 죄를 사하는 새 계약의 성사를 세우셨고, 십자가의 실제적 피 흘림과 죽음을 통하여 이를 실현하셨다. 따라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베드로의 배반도 유다의 배신도 이미 용서하셨다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의 숨(성령)이 제자들에게 불어넣어졌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인간은 천지창조의 마지막 날 사랑이신 하느님의 첫 숨을 받아 생명체가 되었다.(창세 2,7) 이제 하느님의 두 번째 숨이 인간에게 불어넣어졌다면 이는 새로운 창조를 의미한다. 죄악에 빠진 옛 인간은 사라지고 하느님의 자비에 힘입어 구원된 새 인간으로 다시 창조되었다는 말이다. 무엇을 위한 새 창조인가? 바로 자비와 용서와 구원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새롭게 창조된 인간은 제자들로부터 시작하여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와 구원의 복음선포를 위해 파견되는 것이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23절) 따라서 이 말씀은 용서할 것인지, 하지 않을 것인지를 선택하라는 말씀이라기보다 용서하지 않는 자와 용서받지 못한 자는 구원에서 배제된다는 말씀일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토마스 사도가 예수님의 첫 번째 발현에 함께하지 않았던 이유로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겠다고 떼를 쓰는 태도는 합당하게 보인다. 왜냐하면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받았고, 그분의 두 손과 옆구리를 보았기 때문에 그분을 예수님으로 알아 뵙고 기뻐했으니 말이다. 보지 않고도 믿는 행복한 사람은 우리를 두고 하신 말씀이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실제로 보았다는 체험 때문에 목숨을 바쳐 예수님의 말씀을 따랐다. 제자들로부터 상당한 시간과 공간의 거리를 두고 있는 우리에게는 요한복음서 저자의 말대로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의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얻게 하기 위함이며, 또 그 믿음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누구든지 이 기록과 이 기록이 목적하는 믿음에 충실한 만큼 하느님께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주시는 풍성한 자비와 용서와 구원의 은혜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박상대 마르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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