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5월17일(주일) - 부활 제6주일 > 복음 묵상

백삼위 한인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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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묵상

[] 2009년5월17일(주일) - 부활 제6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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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작성일 : 2009-05-16 조회수 : 2,0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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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활 제6주일 (나해) [오늘의 복음} 요한 15,9-17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10)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11)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12)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13)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14)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15)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16)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17)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복음산책] 단 하나의 계명 : 서로 사랑하여라. 지난 주일 복음에서 보았듯이 포도나무의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지 않고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렇게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포도나무와 가지와 농부’의 비유를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제자들, 나아가 하느님과의 관계를 정립하시고, 제자들이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예수님 안에 끝까지 머물러 있으라고 당부하셨다.(요한 15,1-8) 하지만 사람의 관계는 자연에서 보는 나무와 가지의 관계와는 다르다. 세상이 주는 어떤 고통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예수님 안에 끝까지 머무를 수 있는 가능성은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는 확률보다 훨씬 적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정말 그분 안에 머물러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신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계명이다. 오늘 복음에서도 전체의 흐름을 꿰뚫고 있는 모티브는 열매를 맺기 위한 가지와 포도나무의 뗄 수 없는 관계이다. 포도나무인 예수님께 가지들인 제자들이 머문다는 것은 곧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무조건 당신의 사랑 안에 머물라고 명하시는 것은 아니다. 스승인 예수님께서 먼저 제자들을 사랑하셨고, 그 사랑은 아들을 사랑하신 아버지께로부터 배운 것이었다. 따라서 스승의 제자들에 대한 사랑은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사랑이 그 기초가 된다.(9절) 이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 안에 머무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신다. 그것은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이것 또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무조건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아들이 먼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 사랑 안에 머무는 것을 모델로 제시하신다.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10절) 예수님께서는 아들로서의 자신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사실을 대단히 기뻐하신다. 제자들이 스승을 따라 계명을 지켜 그 사랑 안에 머문다면 마찬가지로 기쁨이 보장될 것이며(11절), 이 기쁨은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제자들에게까지 베풀어주시는 기쁨이다. 계명을 지킴으로써 사랑 안에 머문다는 것은 사실상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이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고 난 뒤, 즉시 새 계명을 선포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13,34) 이렇게 계명과 사랑은 서로 묶여 있다. 구약성경을 따르는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계명과 사랑이 서로 별개의 것이며, 사랑이 계명에 종속되어 계명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신약성경 후기에 사는 우리에게도 구약의 율법은 있고, 이 율법으로부터 물려받은 십계명도 여전히 효력을 발생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계명들 속에서 사랑을 솎아내어 모든 계명 위에 세우셨고 모든 율법서와 예언서의 골자로 사랑을 제시하셨다. 그래서 모든 율법과 계명 중에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계명인지를 묻는 율법학자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신명 6,5)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 22,37-40) 이렇게 해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동시에 사랑의 이중계명으로서 모든 계명의 핵심이요 골자다. 이제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곧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이 계명 중의 어느 하나가 아니라 계명의 전부인 셈이다. 따라서 사랑하는 사람은 계명의 전부를 지키는 것과 같다는 결론이다. 그런데 사랑이 추상적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사랑의 구체적인 모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사랑한 것처럼’(13,34)이라는 모범 안에 들어 있다. 여기서 사랑은 낙관주의(樂觀主義)자들이 생각하는 화사하고 달콤한 로맨스(romance) 같은 낭만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사랑한 모델은 곧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 앞에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심으로써”(필리 2,8)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세상에 내어놓은 사랑이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당장 제자들의 목숨까지 요구하면서 사랑하라는 것은 아니다. 우선 ‘스승이 제자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라는 것이다. 사랑의 교과서는 예수님이시다. 그러나 그 책 안에 들어 있는 사랑을 구체적으로 배워 실천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숙제이다. 숙제를 하면서 늘 지켜야 할 최소한의 규칙이 있다. 그것은 바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는 황금률이 아니겠는가? 결국 사랑하는 동시에 계명 준수가 이루어진다. 물론 사랑한다는 것이 자칫 추상적인 관념에만 머물 수 있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사랑을 실천했을 때 계명 준수가 이루어진다. 만약 사랑의 실천이 잘 되었는지, 그래서 계명 준수가 잘 이루어졌는지 알아보고 싶다면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마음속에 기쁨이 동(動)하고 있어야 한다. 기쁨은 곧 만족감이며, 이 기쁨은 바로 예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기쁨이다.(11절) 이 기쁨으로 자신을 충만케 하려면 사랑의 실천이 일상의 습관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거듭 강조하시는 사랑의 계명은 곧 ‘서로 간의 사랑’으로서 이 사랑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사랑한 모범적 사랑에 근거한다.(12절) 사랑에도 등급(等級)이 있으며, 사랑도 정도에 따라 차이가 있다. 사랑은 쉽게 추상적인 것이 돼버릴 수 있으므로 “사랑한다.”는 말만으로는 가장 작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사랑은 구체적인 옷을 입고 드러나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큰 사랑으로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13절)며 잘라 말씀하신다. 그렇다고 사랑이 벗을 위한 목숨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나아가 주인이 종에게 명령하거나 강요하여 얻어내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사랑은 자유로이 이루어지며 가장 큰 사랑은 ‘친구를 위해 목숨을 바침’으로 드러난다. 이것도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고별의 밤을 지낸 다음 날 실제로 보여주실 모범적 사랑에 근거한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아들로서 아버지와 공유하는 지식을 제자들에게 알려주었다는 이유로 제자들을 ‘종’이 아닌 ‘친구’로 부르신다.(15절) 물론 예수님과 제자들의 ‘친구관계’는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계명에 충실한 것처럼 제자들도 예수님의 계명에 충실해야 한다는 조건으로 성립된다.(14절)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 번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상기시키신다. 가지가 나무를 선택할 수는 없다. 당연히 나무가 가지를 선택하는 것이며, 가지는 철저히 나무에 종속된다. 즉 나무와 가지는 ‘주인과 종’의 관계에 있다. 그러나 가지가 사랑의 계명을 통하여 영원히 남을 열매를 맺는다면 이 관계는 ‘친구와 친구’의 관계로 전환된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느님 앞에 ‘예수님의 이름을 통하여’ 구할 수 있는 최고의 값진 것이 아니겠는가? 예수님은 자신의 모든 가르침을 통하여 단 하나의 계명을 요구하신다. “서로 사랑하여라.”[◆박상대 마르코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