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6월22일(주일) - 연중 제12주일 > 복음 묵상

백삼위 한인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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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묵상

[] 2008년6월22일(주일) - 연중 제12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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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작성일 : 2008-06-21 조회수 :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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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중 제12주일 (가해) [오늘의 복음] 마태 10,26-33 <너희는 육신을 죽이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26) “그러니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27)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 28)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29)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30)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31)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32)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33)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복음산책] 동일한 운명과 생명의 공동체 오늘 복음은 마태오복음이 전하고 있는 예수님의 파견설교(10장)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제자들 가운데 12명을 뽑아 사도로 세우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악령을 제어하고 병자를 고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면서 우선은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나아가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게 하신다. 아울러 선교상에 필요한 그러나 아주 엄격한 여장규칙과 지침을 하달하신다.(10,5-15) 선교상의 여장규칙과 지침이 엄격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스승은 사도들을 파견하는 것이 마치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고 하시면서 그들이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기를 바라신다.(10,16) 그러나 피할 수 없는 박해가 사도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세상의 반대를 받은 이유는, 재물과 권력과 명예를 더 좋아하는 세상이 진리와 봉사와 사랑을 피력하는 복음의 근본정신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원래 세상, 또는 세속의 본성이 그렇다. 그러므로 세상은 복음에 무관심과 적대심을 표하게 되고, 무관심은 독선(獨善)을 조장하고 적대심은 박해를 가져오기 마련이다. 박해를 피하는 길은 복음을 등지고, 스승의 가르침을 도외시하고 세상과 타협하는 것뿐이다. 교회는 세상과 흥정을 벌이고 급기야 타협할 수 있을지 모르나 복음은 절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복음과 떨어져 존재할 수 없다면 예수의 운명을 복음 선포자의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복음 선포자는 다양한 형태의 박해를 각오해야 하며, 실제로 그 길을 걸어야 한다. 하지만 그 길에는 성령께서 선포자를 동반하실 것이고, 그 길 끝에는 천상의 월계관이 선포자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복음선포와 맞서는 실제적 박해 상황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말고 끝까지 항구할 것을 요구하신다. 오늘 복음보다 앞서간 단락에서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고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 제자가 스승처럼 되고 종이 주인처럼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10,24-25)는 말씀은 복음 선포자가 스승인 예수님보다 더 나은 팔자(八字)를 기대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스승께서 이미 베엘제불(마귀두목)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고(9,34) 모함을 받았으니, 복음 선포자도 같은 모함을 받을 것이라는 말이다. 결국 예수님과 복음 선포자,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은 철저하게 같은 팔자와 운명을 가진다는 것이다. 이는 사도 바오로가 그토록 강조하는 그리스도와 세례 받은 자의 운명 공동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 공동체는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성령께서 이루시는 성삼(聖三) 하느님의 생명 공동체에로 질서 지워진다. 그러므로 복음 선포자가 두려워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예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세 번씩이나 박해하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권고하신다.(2628.31절) 두려워해야 할 것이 있다면 영혼과 육신을 아울러 지옥에 던져 멸망시킬 수 있는(28절) 하느님이시다. 그러나 하느님을 두려워함은 지혜의 시작이 아니겠는가?(집회 1,14) 따라서 복음 선포자는 복음을 통하여 예수님으로부터 은밀히 배운 모든 것을 아무 거리낌이나 두려움 없이 공공연히 선포할 수 있게 된다. 나아가 상황이 요구한다면 목숨까지 내어놓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사람의 목숨도 아무 값없이 그저 바쳐지는 경우는 없다. 그래서 어떤 순교도 순교자 안에 거처하시는 성령의 활동이 아닌 것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공중을 날고 있는 하찮은 참새 한 마리도 하느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땅에 떨어지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29절) 하느님께서는 복음 선포자를 이런 참새보다도 훨씬 귀하게 여기시며, 각각의 머리카락을 낱낱이 세어두실 정도로 마음을 쓰시고, 소중히 여기시며, 실제로 이를 실천하시기 위하여 심혈을 기울이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30-31절) 예수님 때문에, 그리고 복음 때문에 당해야 하는 박해 앞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 지에 대한 명확한 답은 사실상 없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이 극한 박해에 직면하여 있지는 않다. 그러나 미소한 손해에서부터 목숨까지 내어놓아야 하는 다양한 형태의 박해 상황은 언제나 존재한다. 분명한 것은 지금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 어떠한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취한 태도만큼 그분으로부터 대우를 받는다는 것이다 이는 곧 복음 선포자와 예수님 사이에 종말론적인 ‘동태(同態)보상률’이 적용됨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모든 복음 선포자들에게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32-33절; 마르 8,38; 루카 9,26 참조)◆(박상대 마르코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