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8년11월30일(주일) - 대림 제1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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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림 제1주일 (나해) [오늘의 복음] 마르 13,33-37 <집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깨어 있어라.> 33)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그때가 언제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34) 그것은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의 경우와 같다. 그는 집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자에게 할 일을 맡기고, 문지기에게는 깨어 있으라고 분부한다. 35) 그러니 깨어 있어라. 집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저녁일지, 한밤중일지, 닭이 울 때일지, 새벽일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36) 주인이 갑자기 돌아와 너희가 잠자는 것을 보는 일이 없게 하여라. 37)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깨어 있어라.”◆ [복음산책] 예수님의 성탄과 그분의 재림을 기다리는 대림시기 첫 주일과 함께 우리 가톨릭교회는 새로운 한해의 전례주년을 시작한다. 오늘이 그 첫날인 것이다. 전례주년의 기본적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과 공생활, 그리고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한 하느님의 인류구원역사를 ‘오늘’(now), 그리고 ‘여기’(here)에 재현하고 기념하는데 있다. 가톨릭교회는 하느님의 인류에 대한 구원사건의 신비를 1년의 전례주년 안에서 시기별로 나누어 기념함으로써 구원사건의 신비를 재현하고 이에 신자들의 삶을 질서 지우고자 한다. 전례주년은 특히 ‘오늘’이라는 시간(時間)과 ‘여기’라는 장소(場所)의 성화(聖化)를 강조한다. 매년 반복되기에 다소 지루한 감을 주기도 하지만, 전례주년은 하느님께서 전 인류와 전 역사에 베푸신 구원의 신비와 은총을 1년이라는 주기 속에서 ‘바로 이 시간과 이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사건으로 체험함으로써, 신자들이 자신의 삶을 거룩하게 변화시켜 찬미와 기쁨으로 아버지 하느님 앞에 조금씩 나아갈 수 있는 계기를 지속적으로 마련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이러한 전례주년의 신비 속에서 매번 그 사건(개별적 구원사건과 성인축일)의 의미를 충분히 묵상하여 전례에 참여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성화하여 이 세상과 인류의 구원을 위한 참다운 ‘성사’(聖事)로서의 사도직을 충실히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새로운 전례주년의 첫날에 선포되는 메시지는 “깨어 있어라.”(마르 13,33-37; 마태 24,43-44; 루카 21,25-36)는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메시지는 한해 전례주년을 마감하는 마지막 날인 연중 제34주간 토요일 미사의 복음에서 선포되는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36)는 메시지와 같다. 따라서 “깨어 기도하며 준비하고 있음”은 한해 전례주년 전체의 의미와 목적을 깨닫고 이를 성취하기 위해 꼭 필요한 요건이다. 우리가 1년 전례주년 내내 ‘늘 깨어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재림하시는 인자(人子)와 함께 세상의 종말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기 때문이며, 그 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재림하시는 인자 앞에 떳떳하게 설 수 있기 위함이다. 우리는 공관복음에서 인자의 재림이 두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음을 배웠다. 하나는 재림의 순간이 눈으로 알아볼 수 있는 묵시적(黙示的) 징조나 표징과 함께 장엄하게 다가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무런 전제적 조짐 없이 도둑이나 덫처럼(마태 24,43; 루카 12,35.39)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들이닥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중에 어느 하나를 선택하려거나 어느 것일까 하고 점치려 해서는 안 된다. 잘 못 골랐다간 낭패를 보기 때문에 둘 다를 염두에 두는 것이 상책이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느 주일 미사가 끝나자 성당 문이 열리고 미사를 마친 사람들이 썰물 빠지듯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사람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시끌벅적하게 서로를 반갑게 맞으며 손을 건네며 인사를 나누었다. 말쑥한 차림의 신자들 사이에 아주 허름한 차림의 볼 품 없는 한 사나이가 있었다. 그는 피곤에 지쳐 서 있을 기력조차 없어 보였다. 그런데 어느 누구하나 이 사나이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막 미사를 마친 사제도 제의를 벗고 성당 마당으로 나와 신자들과 함께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러다 사제는 어느덧 어느 누구 하나 눈길을 주지 않았던 허름한 차림의 그 사나이를 보게 되었다. 사제는 이 사나이를 본 순간 얼굴빛이 하얗게 변해 버렸다. 그리고는 쏜살같이 그 사나이에게 달려가 소매를 잡아끌다시피 하여 사제관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사제관에 들어서자마자 사제는 사나이 앞에 무릎을 꿇고 애절하다시피 말을 건넸다. “주님, 어쩌자고 지금 여기에 나타나셨습니까? 우리 식대로 잘 꾸려나가고 있는데, 무슨 평지풍파(平地風波)를 일으키시려고 이곳에 오셨습니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제발 하늘로 돌아가 주십시오. 우리가 지금처럼 잘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하늘로 돌아가 주십시오. 그리고 다시는 오시지 마십시오.” 허름한 차림의 볼 품 없는 한 사나이, 세상을 돌아보시고 흩어진 이들을 모아 하느님 나라를 다시 세우시려고 오신 그분은 씁쓸한 표정으로 “알았네.”라는 한마디 말을 남기시고 홀연히 사라지셨다. 누가 꾸며낸 것이겠지만 정작 우리가 주님의 재림을 입으로는 고대하지만 마음으로부터는 크게 바라지 않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대변하는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싶다. 이는 대림절을 이미 오신 예수님의 성탄만을 준비하며 그저 기쁘게 지내자는 의도와 같을 것이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도 주님께서 하늘을 찢고 내려오시기를 바라고 있으며(이사 63,19), 사도 바오로도 우리 주 예수께서 나타나실 그리스도의 날에 흠잡을 데 없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라고 있지만(1코린 1,7-8), 정작 우리는 이대로가 좋고, 이대로 더 살기를 바라고 있는 실정이다. 사실 당장 주님의 재림이 눈앞에 펼쳐지고 이와 함께 세상이 끝장나는 꼴을 바라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그 날은 온다. 단지 그 날과 그 시간을 우리가 모를 뿐이다. 인자의 재림과 세상의 종말은 준비된 ‘바로 그 날’에 일어날 사건이 되겠지만, 사실상 ‘갑자기’ 들이닥친다는 데 매력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늘 깨어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가 이미 우리 가운데 있듯이(루카 17,21) 인자의 재림도 반드시 미래의 어떤 사건만은 아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 영광의 몸으로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다면(마태 28,20), 인자의 재림은 이미 우리 가운데 시작된 사건이다.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이 세상은 더 이상 옛적의 세상이 아니다. 이 세상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새 하늘과 새 땅, 새 창조를 향하여 그 여정을 시작하였고, 서서히 완성되어 가고 있다. 따라서 인자의 재림은 예수님 편에서 볼 때, 별다른 사건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인간 편에서 볼 때, 이 사건은 나자렛 예수와 더불어 시작된 하느님의 심오한 구원계획이 완성됨을 증명하는 사건이고, 그분이 누구인지를 드러내는 우주 계시적 사건이며, 영광의 그분 앞에 서게 될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드러내는 사건이 될 것이다. 더러는 길게 살고, 더러는 짧게 사는 것이 세상이지만, 누구에게나 탄생과 죽음은 세상의 창조와 종말의 의미를 가지며, 탄생부터 죽음에 이르는 한 개인의 역사도 마찬가지로 창조부터 종말에 이르는 세상 전역사의 의미를 가진다. 나의 존재가 사람들 앞에서는 비록 하찮은 것으로 보일지라도 하느님 앞에서는 결코 그럴 수 없다. 내가 없으면 창조도 없고 종말도 없기 때문이다. 누구도 대신 살아줄 수 없는, 그러기에 스스로 최선을 다해야 하는 나만의 삶을 소중함과 자랑스러움으로 새로운 한해 전례주년을 살도록 하자. 그리고 그 삶을 사는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세상을 만들어 보자.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시작하신 일, 그 일을 당신 뜻에 맞게 질서 지워주시고, 용기와 지혜로써 진보하도록 이끌어 주시며, 은총과 자비하심으로 그 마침을 채워주실 것을 굳게 믿으며 대림시기, 새해 첫날의 발걸음을 힘차게 내딛자.◆[박상대 마르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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