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8년9월28일(주일) - 연중 제26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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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중 제26주일 (가해) [오늘의 복음] 마태 21,28-32 <맏아들은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수석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셨다. 28)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 하고 일렀다. 29) 그는 ‘싫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다. 30) 아버지는 또 다른 아들에게 가서 같은 말을 하였다. 그는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고 대답하였지만 가지는 않았다. 31)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 그들이 “맏아들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32)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 [복음산책] 상식을 깨는 폭탄선언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두 아들의 비유는 마태오복음에만 있는 특수사료이다. 이 사료의 위치를 살펴보면 그 진가를 알 수 있다. 오늘의 복음말씀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활동 시작부분에 위치하여 있다. 마태오복음에 의하면 세례자 요한이 감옥에 갇힘(마태 4,12)과 더불어 예수님의 공적 활동이 시작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약 3년간 갈릴래아에서의 활동(마태 4,12-18,35)을 마치시고, 예루살렘으로 상경(마태 19,1-20,34) 하신다. 군중의 열렬한 환호 속에 거행된 장엄한 예루살렘 입성(마태 21,1-11)으로 시작된 예수님의 예루살렘 활동(마태 21,12-27,66)은 그분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무덤에 묻힘으로 마감된다. 하지만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과 승천 직전 제자들에게 대한 복음선포 사명의 수여로 마태오복음은 끝난다.(마태 28장) 예수님께서 행하신 갈릴래아에서의 가르침과 업적을 한 마디로 종합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구약의 율법과 예언의 진정한 해석자요, 성취자로 이해하시며, 나아가 자신을 만백성의 메시아로 내세우신다. 이는 아들이신 예수님이 율법과 예언을 세우신 아버지 하느님의 정신에 신뢰와 순종으로 그 안에 머물러 있음으로써 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과 활동은 율법에 의해 피해를 받는 죄인들과 병자와 약자들에게는 믿음과 수용으로 드러나지만, 율법을 관리하고 준수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게는 불신과 거부로 드러났다. 이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하셔야 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최고 지도급인 원로들과 수석사제들, 곧 하느님의 율법과 예언을 관리하고 하느님과 백성 간의 관계를 중재하는 바로 이들과 본격적으로 논쟁을 벌이는 일이다. 이는 곧 믿음과 불신, 수용과 거부의 간격을 더욱 벌려, 벌어진 간격 속에 모두를 빠뜨리는 일이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최종적인 선택의 기회를 주시려는 것이다. 불신과 거부와 불순종은 예수님을 죽음으로 내몰고 또다시 율법의 노예가 되겠지만, 믿음과 수용과 순종은 예수님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자유와 구원과 영생을 얻을 것이다. 이 일에 오늘 복음의 ‘두 아들 비유’가 한 몫을 하고 있다. 이 비유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과격하게 성전을 정화하신 일로 수석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과 예수님의 권한에 관해 벌이신 논쟁에 대한 대답이다. 사람이 사는데 가장 많이 사용하고 또 사는데 꼭 필요한 말이 있다면, 그것은 서로 뜻이 상반되는 [Yes!]라는 말과 [No!]라는 말이다. 이 두 가지 말의 뜻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말은 흔히 각각 두 가지씩의 뜻으로 쓰인다. 한 가지는 사물에 대한 옳고 그름을 표시하는 뜻으로서 “예, 맞습니다.” 그리고 “아니요, 틀립니다.”라는 것이다. 이는 나 스스로의 판단에 의한 진위(眞僞)의 표명이다. 다른 한 가지로 쓰이게 되는 경우는 “예, 하겠습니다.”와 “아니오, 하기 싫습니다.”라는 스스로의 의지(意志)의 표현으로 쓰이게 되는 경우이다. 내가 얼마나 알고 있는가하는 지식의 판가름에서 표명하게 되는 첫 번째 경우와 사람의 의지를 표명하는 두 번째 경우는 서로 다르다. 사실의 진위를 표명하는 [Yes!] 또는 [No!]라는 말은 그 대답에 대한 좋고 나쁨을 구별할 수 없지만, 두 번째의 경우에는 다르다. 우리는 때때로 하기 싫으면서 하겠다고 말하기도 하며, 하고 싶지만 하지 않겠다고 말해 버린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의 한도 내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예, 맞습니다.” 또는 “아니요, 틀립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지만, 자신의 의지를, 자신의 마음을 “예!” 또는 “아니요!”라고 표현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말이란 글에 비하여 한번 해 버리면 다시는 고칠 수 없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한번 해 버리면 고칠 수도 지울 수도 없는 것이 말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마음은 다르다. 마음은 언제든지 고쳐먹을 수가 있다. 오늘 복음 말씀을 잘 살펴보면 지울 수 없는 말과 지울 수 있는 마음의 관계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 하고 일렀는데, 그는 ‘싫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다. 아버지는 또 작은 아들에게 가서 같은 말을 하였다. 그는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고 대답하였지만 가지는 않았다.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겠는가? 이 질문에 누구나 “맏아들이다.”고 대답할 것이다. 수석사제들과 원로들도 같은 대답을 했다. 그런데 이 대답은 사실의 진위에 대한 대답이다. 자기 의지와 마음에 따른 대답은 여전히 남아있다는 것이다. 율법에 대한 지식이 많고 명석했던 학자들이 올바른 대답을 한 것은 틀림없으나 그들이 마음이 굳어있어 그들 자신이 바로 작은아들에 해당됨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이제 예수님은 똑똑하다는 그들을 사정없이 구렁텅이에 빠뜨리신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31절) 이는 종교적 상식을 깨는 폭탄선언에 가깝다. 어찌 죄인들이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든다는 것인가? 그들은 세례자 요한의 가르침을 듣고 자신의 생각을 바꾸어 믿었기 때문이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으로 변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올바른 삶에로 걸어가려는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는 그 과거를 묻지 않으신다. 하느님께서는 뉘우치는 마음과 겸손한 마음으로 사는 현재의 삶을 받아 주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을 때, 하느님의 뜻과 가르침을 따라 “예, 하겠습니다.”하고 대답했지만, 오늘 복음의 작은아들처럼 말만 해놓고 실제 신앙생활에서 오히려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져가고 있지 않는지, 자신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말로만 “예!”하거나,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만 하는 신앙생활, 마음으로 우러나오지 않는 그런 신앙생활을 분명 하느님께서 원하지 않으실 것이다. 항상 올바른 대답을 할 줄 알고 그 대답대로 성실히 살아가는 신앙인, 설사 대답은 시원찮게 했더라도 즉시 마음을 고쳐먹고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구하는 겸손한 신앙인, 그런 신앙인이 되기로 노력하자.◆[박상대 마르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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