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8년8월31일(주일) - 연중 제22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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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중 제22주일 (가해) [오늘의 복음] 마태 16,21-27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려야 한다.> 21)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22)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2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2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25)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26)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27)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복음산책] 잘라 먹은 십자가 요셉이라는 본명으로 세례 받은 한 신자가 있었다. 그는 다른 어느 신자보다도 모범적인 신자로서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신앙인답게 살았으며, 주일미사는 물론 평일 미사도 곧잘 참례하고, 레지오에도 가입하여 열심히 활동하였으며 성당일이라면 두발 벗고 나서는 성실한 신앙인이었다. 그는 자기 스스로 다른 어느 신자보다도 신심이 깊다고 자부했다. 사실이 그랬다. 신앙생활을 시작하여 누구보다도 열심 했던 요한은 3년이 지나자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물음을 던지고 자기 믿음에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신앙생활을 어느새 불규칙적으로 변했고, 어려운 일들을 참고 잘 해결해 내던 그는 이제 신경질적이고 화도 곧잘 내는 신자로 바뀌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요셉은 ‘신앙생활의 권태기’에 접어든 것이었다. 그는 직장과 성당 뿐 아니라 가정에서도 자기의 어려움을 아무도 몰라주고 이해해 주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요셉은 꿈을 꾸게 되었는데 꿈속에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자신을 발견했다. 정말 무거운 십자가였다. 금방이라도 자신을 짓눌러 땅에 처박을 만큼 그런 육중한 십자가였다. 간신히 고개를 들고 주위를 살펴보니 자기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지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제각기 지고 가는 십자가의 모양은 서로 달랐다. 자기 보다 더 큰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 더 작은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 등 가지각색이었다. 어느새 요셉도 사람들 틈에 끼어서 십자가를 짊어진 채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길은 항상 평탄한 것이 아니었다. 때로는 산길이며, 자갈길도 있었고, 모래밭도 있었고, 가시덤불이 우거진 그런 길도 있었다. 그냥 맨몸으로 걸어간다 해도 어려울 그런 길이었다. 요셉은 문득 이렇게 가다간 도중에 꼬꾸라져 죽고 말 것이라 생각했다. 어느새 요셉은 자기 십자가의 한 귀퉁이를 자르고 있었다. 져보니 전 보다 훨씬 가벼웠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는 또 다시 한 귀퉁이를 잘라 먹었다. 많은 사람들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넘어져 다친 사람도 있었고, 무릎이 깨져 피를 흘리는 사람도 있었지만 모두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열심히 가고 있었다. 바위투성이인 산길을 내려오다가 십자가가 나무에 걸리자 미끄러져 굴러 떨어진 요셉은 하마터면 바위에 부딪혀 머리가 깨질 뻔했다. 죽을 뻔했던 그는 십자가의 밑동을 사정없이 잘라 버리고 말았다. 십자가는 매우 가벼워 졌다. 요셉은 나르듯이 뛰어 가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바보 같은 사람들, 사람이란 자고로 나처럼 머리를 써야 하단 말이야.” 하고 비웃으면서 앞질러 갔다. 평탄한 길에 접어들자 요한은 더욱 속력을 내어 뛰어갔다. 얼마나 뛰었든지 뒤에 오는 사람들이 보이질 않았다. 앞에 보이는 저 언덕에서 좀 쉬면서 고생하며 오는 사람들 구경이나 좀 하자라고 생각한 요셉은 단숨에 언덕을 올라갔다. 올라서자마자 갑자기 비쳐오는 광채 때문에 눈을 뜰 수 없었던 요셉은 한 손으로 눈을 가리면서 그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은 바로 천국이었다. 성경에서 읽었던 많은 분들과 성인성녀들이 나르는 천사들에 둘러 싸여있었다. 그 중에 한분이 광채를 온 몸에 뒤집어 쓴 모습으로 요셉에게 가까이 왔다. 요셉은 이 분이 바로 예수님이심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예수님은 요셉에게 말을 건네셨다. “요셉아, 먼 길을 오느라고 얼마나 수고가 많았느냐! 네가 보고 있는 저 나라가 바로 내 아버지의 나라인 천국이다. 이제껏 네가 어깨에 지고 온 십자가를 앞에 가로 놓고 그 위를 지나 나를 따라 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 지고 온 십자가를 앞에 놓기 위해 아래를 쳐다 본 요셉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왼쪽 오른쪽, 시작도 끝도 보이지 않는 절벽이 예수님과 자기 사이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요셉은 자기 십자가를 그 절벽에 가로 놓으려 했지만 어찌되었겠는가? 그러기엔 너무 짧았다. 너무 많이 잘라 먹고 말았던 것이다. 아쉽고 후회스럽고 코끝이 찡한 온갖 감정이 솟구쳐 눈물이 핑 돌고 말았다. 그러는 사이에 다른 사람들이 하나 둘씩 도착하기 시작하였다. 지칠 대로 지치고 피투성이가 된 그들은 제각기 자기가 지고 온 십자가를 가로 놓고 그 위를 지나 예수님께로 건너갔다. 예수님은 그들을 하나하나 반겨주시면서 땀을 닦아 주시고 감싸 주셨다. 그러고는 천사들의 인도를 받아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마지막 사람이 건너가자 예수님은 요셉에게 등을 돌리고 떠나가 버렸다. 그제야 예수님을 부르면서 도와달라고 울부짖었건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예수님을 가버렸다. 머리를 땅에 박고 땅을 치며 통곡하던 요셉은 그만 꿈에서 깨어났다. 꿈이었기에 얼마나 다행스러웠는가. 그날부터 요셉은 달라졌다. 무거운 십자가에 억눌려 잘라먹었던 요셉은 영원한 천국의 생명을 잃을 뻔했던 것이다. 자기의 어려움을 남은 몰라도 하느님만은 알고 계셨다고 굳게 믿은 요셉의 신앙생활은 예전 보다 더 성실히 변해갔다.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기쁜 마음으로 지고 가는 것이었다. 요셉의 생활은 나날이 기쁨으로 충만했다. 오늘 복음은 지난 주일복음에서 다루었던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연결되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한 첫 번째 예고’와 ‘참된 제자의 길’에 관한 말씀이다. ‘참된 제자의 길’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분을 어떻게 따라야하는지 그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제자가 스승을 따르는 데는 여러 가지 길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스승을 가장 잘 따르는 방법은 스승이 걸어간 길을 그대로 가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오늘 복음은 지난주일 복음을 통하여 주어진 베드로의 숙제를 풀어가는 교과서가 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자신의 종말에 관하여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이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느닷없이 듣게 된 스승의 비참한 종말에 제자들은 모두 놀랐다. 예상 밖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자신이 방금 스승으로부터 받은 엄청난 권한을 스승의 비참한 종말을 제지하는 데 쓰려했다. 그것은 베드로가 하느님의 일(방법)은 생각하지 않고 오직 사람의 일(방법)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자는 바로 ‘사탄’으로 취급된다. 스승에 대한 신앙고백에서 구두시험 100점을 맞았던 베드로가 당장은 아니지만 실기시험에서 곧바로 빵점을 맞게 된 이유가 그것이다. 그래도 수제자인 베드로에게 스승의 ‘사탄’이란 표현은 사뭇 지나치게 들린다. 그러나 결코 지나치지 않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인간적인 생각이 몰고 올 최악의 상태를 미리 보고 계신 것이다. 이는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느님의 영의 도움으로 정확한 신앙고백을 했던 시몬 베드로에게 ‘진복’을 선언하시고, 엄청난 권한과 함께 그 위에 교회를 세우시며, 그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맡기신 경우와 마찬가지다. 우리말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셨으나, 원문에는 “사탄아 내 뒤로 가라.”고 되어있다. 이것이 올바른 제자 됨의 방법이요, 길이다. 자기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 뒤에서, 즉 하느님과 예수님의 생각으로 그분을 따르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수난의 길을 가셨고, 자기 목숨을 내어놓음으로써 오히려 목숨을 얻어 생명의 주인이 되셨듯이, 예수님의 제자도 똑같은 방법으로 스승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당장 자신을 버리고, 목숨을 내어놓는 것만이 능사(能事)는 아니다. 자아를 부정하는 것은 오히려 자아를 긍정하는 것이고, 목숨을 버리는 것은 목숨을 더 사랑하는 것이다. 단지 긍정과 사랑이 예수님의 가르침(이론)과 모범(실천)에 질서 지워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요구를 글자그대로 따를 수도 있지만, 일찍이 도미니코(1170-1221) 성인 시절에 “카타리파”(극단 순결주의)나 “발덴파”(극단 청빈주의)가 교회의 단죄를 받았듯이 어느 것도 극단적인 방법은 옳지 않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긍정하고 존중하며, 자연과 생명을 아끼고 사랑하면서 자기에게 주어진 고유의 십자가를 잘라 먹는 일 없이 성실히 지고 영원한 생명의 그곳을 향하여 살아가는 일이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은 일괄 거래되어야 하는 하나의 상품, 즉 패키지(package)와도 같은 것이다. 아무도 수고 없이 금메달을 딸 수 없으며, 열매를 먹을 수 없다. 하느님께서 우리 생각과는 달리 주시는 모든 고통과 시련은 더 큰 영적성장을 위한 조건이 된다는 말이다.◆[박상대 마르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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