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9월7일(주일) - 연중 제23주일 > 복음 묵상

백삼위 한인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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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묵상

[] 2008년9월7일(주일) - 연중 제23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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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작성일 : 2008-09-06 조회수 : 2,0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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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중 제23주일 (가해) ◉ [오늘의 복음] 마태 18,15-20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는 것이다.> 15)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 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16)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17)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1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19)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20)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복음산책] 교회 안의 죄인 다루기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마태오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공생활 중에 주신 가르침을 상당부분 논리적으로 정리하여 산상설교(5-7장), 파견설교(10장), 비유설교(13장), 공동체설교(18장), 종말설교(25장)로 엮었다. 오늘 복음은 바로 공동체설교의 일부분이다. 공동체설교는 교회 안에서 신자들 간에 지켜져야 할 규범을 담고 있어 ‘교회규범’이라고도 한다. 이는 교회 안에서 뿐 아니라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작은 교회’로 통하는 가정교회의 규범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공동체설교는 당장 예수님 주위의 제자들에게 향하기보다 마태오복음공동체를 포함한 초대교회를 지향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마태오의 편집의도가 많이 첨가됐다는 뜻이기도 하다. 공동체설교에는 모두 일곱 개의 교회규범이 들어있다. 이를 차례로 살펴본다면 다음과 같다. ①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어라.(1-5절) ② 남을 죄짓게 하지 말라.(6-9절) ③ 보잘것없는 이들을 업신여기지 말라.(10절) ④ 율법상의 죄인들과 윤리상의 죄인들을 소외시키지 말라.(12-14절) -> 잃은 양을 되찾고 기뻐하는 목자의 비유 삽입.(12-14절) ⑤ 잘못을 저지른 형제를 바로잡아 주라.(15-17절) -> 베드로에게 주어진 매고 푸는 권한 확대.(18절) ⑥ 두 명 이상 함께 아버지께 청하라.(19-20절) ⑦ 죄 지은 형제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21-22절) -> 무자비한 종의 비유 삽입.(23-35절) 오늘 복음은 잘못을 저지른 형제를 바로잡아 주라는 것과 두 명 이상 주님의 이름으로 모여 함께 아버지께 청하라는 규범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이다. 언뜻 보기에 오늘 복음의 두 규범은 서로 다른 내용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두 규범을 서로 연결하여 생각해 볼 수도 있다. 형제가 ‘너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우선 가해자인 형제와 피해자인 본인 단 둘이 만나서 그 잘못을 타일러 주는 것이 첫 번째 할 일이다. 여기서 ‘너’는 제자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잘못은 당사자에게만 국한된 잘못이 아니라 교회와 관련된 잘못이다. 공동체에 속한 한 사람의 모든 잘못은 그것이 공적이든 사적이든 간에 교회 전체와 관련이 있으며, 나아가 하느님과 관련이 있다. 잘못을 한 형제가 타이르는 말을 들으면 일단 거기서 사건은 마무리되지만 말을 듣지 않을 경우는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복수증인을 택하라는 것이다. 증인을 복수(複數)로 택하라는 지시는 이미 유다인들 사이에 널리 통용되는 관습이다.(신명 19,15) 죄인이 증인들의 말도 듣지 않을 경우는 3단계로 넘어간다. 즉 교회 앞에 데려가라는 것이다. 여기서 교회는 마태오복음공동체를 의미하는 지역교회를 말한다. 죄인이 교회당국의 말도 듣지 않으면 최종 단계로 넘어간다. 최종단계는 죄인을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겨 지역교회에서 추방하거나 파문하는 일이다. 유대인들은 다른 신을 믿는 이방인들이나 로마제국을 위한 세리들을 업신여기고 냉대하며, 그들과 절연(絶緣)하는 것을 당연시하였다.(마태 5,46-47; 6,7 참조)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부류의 사람들과 친구로 지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마태 11,19) 교회당국이 최종적으로 죄인을 추방하고 파문하는 권한은 베드로에게 주어진 매고 푸는 권한(마태 16,19; 마르코와 루카복음에는 없음)을 상기시킨다. 그런데 여기서 마태오복음사가는 이 권한을 제자들 모두에게 확대시키고 있으며, 나아가 교회 전체에까지 확대시키고 있다.(18절) 그 이유는 무엇일까? 잘못한 사람을 단죄(斷罪)하는 일은 이미 산상설교를 통해서 금지되었다.(마태 7,1-5) 그 이유는 자신도 단죄 받기 않기 위함이며, 하느님 앞에 어느 누구도 죄인이 아닌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태오가 매고 푸는 권한을 교회 구성원 모두에게 확대시키는 것은 그 권한을 제한하려는 역설(逆說)이다. 내가 땅에서 매거나 풀면, 하느님께서도 하늘에서 매거나 푸실 것이기 때문에 함부로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마태오가 비록 자신의 공동체를 위하여 한 죄인을 다루는데 1~3단계의 과정을 제시하고 최종단계로 파문을 지시하고 있지만, 마태오 자신은 공동체 안에 그런 일이 없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죄인을 바로잡아 주라.’는 규범은 ‘둘 이상 함께 아버지께 청하라.’는 규범과 연결된다. 즉 죄인을 만나서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함께 같은 마음으로 기도하라는 것이다.(19-20절) 따라서 둘 이상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여 함께 아버지께 청하면 무슨 일이든 다 이루어진다는 것이 오늘 예수님의 복음(福音)이다. 허나 피해자와 가해자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였다 하더라도 같은 마음으로 하느님께 기도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이 점이 우리 인간의 진면목이며, 풀어야 할 숙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잊지 말고, 용기를 내어 시도해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그곳에 그분께서도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이방인뿐 아니라 세리와 원수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을 친구로 대하시고 사랑하시는 분이시며, 예수님께서 스스로 사람들과 함께 아버지께 기도하시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는 의인들과 선인들이 많다. 하지만 지상교회는 그들만의 교회가 아니다. 교회 안에는 언제나 죄인들이 공존한다. 누가 죄인인지는 다른 사람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가 결정한다. 교회의 의인들은 보통 스스로를 죄인으로 여기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교회 안에는 죄인들뿐이다. 따라서 교회가 해야 할 일은 죄인들을 골라 추방하고 파문하는 최종적인 처방전을 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죄인인 자신들을 위해 함께 기도하는 것이다. 죄인인 우리가 함께 모여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면 그 안에 오로지 의인이신 예수님께서 함께 기도하시기 때문에 그 기도는 꼭 이루어진다. 사랑하는 아들의 기도를 아버지께서 외면하실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기도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께 비는 것이다.◆[박상대 마르코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