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8년10월26일(주일) - 연중 제30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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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중 제30주일 (가해) [오늘의 복음] 마태 22,34-40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34)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의 말문을 막아 버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바리사이들이 한데 모였다. 35) 그들 가운데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다. 36)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37)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8)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39)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40)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복음산책] 새 날이 밝아왔음을 어떻게 아는가?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마태 21,1-11) 예수님은 곧 다가올 삶의 마지막을 위해 분주한 일정을 보내신다. 성전정화 사건으로 예수님의 권한을 놓고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과의 노골적인 논쟁이 벌어지고, 평소에 소원한 관계를 유지하던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뿐 아니라 헤로데 당원들까지 합세하여 예수님을 제거할 함정을 파고 음모를 꾸미고 있다.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예수님과 부활에 관해 논쟁을 벌이다가 낭패를 본 모양이다.(마태 22,23-33 참조) 사두가이들은 종교적으로 모세오경만 경전으로 여겼기 때문에 모세오경에 근거가 없는 부활신앙을 배척하는 사람들이다. 부활신앙이 경전에 등장하는 시기는 기원전 6~2세기경 사이로서 이 시기에 기록된 예언서(이사야, 에제키엘, 다니엘)와 묵시문학(마카베오) 등에 부활신앙이 나타난다. 부활신앙을 욕보일 양으로 사두가이들이 죽은 형의 가문을 이어줘야 한다는 모세의 가르침 중에서 수혼법(嫂婚法; 창세 38,8; 신명 25,5-10)을 근거로 예수님께 괴변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다.”(마태 22,32)는 말씀으로 그들의 말문을 막아버리셨던 것이다. 이 소문이 퍼지자 앞서 있었던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문제’(마태 22,15-22)에서 예수님의 대답에 탄복을 하고 물러갔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다시 몰려왔다. 바리사이들 중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질문을 던진다. 이 시험은 어떻게 하든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넣기 위한 것이었다. 사실 율법 교사들은 모세의 십계명을 세분하여 만들어낸 율법 중 248개의 행령(行令)과 365개의 금령(禁令) 모두를 똑같은 비중으로 여겼다. 이 중에서 가장 큰 계명 하나를 집어내라니(35절), 우리가 보기에도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 하나를 제시하시고, 이 계명에 버금가는 제2의 계명도 잇달아 제시하신다. 그것은 사랑의 이중계명으로 통하는 ‘하느님 사랑’(신명 6,5)과 ‘이웃사랑’(레위 19,18)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두 계명을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로 천명하신다. 구약의 613개 계명들은 분명히 서로 다른 계명들이다. 그래서 율법 교사들은 모든 계명이 똑같은 비중을 지닌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어떤 기준으로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 하나와 이에 버금가는 둘째 계명을 제시하시는 것일까? 그 기준은 간단하다. 무엇 때문에 계명이 존재하는 지를 따져보는 것이다. 계명의 존재이유는 하느님과 인간(이웃)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장 큰 계명인 동시에 모든 계명의 기본적인 정신, 즉 골자가 될 수 있는 것이 바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인 셈이다. 사랑 없이는 어느 계명도 완벽하게 준수될 수 없고, 빈껍데기로 있을 뿐이다. 바로 사랑이 하나의 계명을 성취시켜 충만하게 만드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 누구도 구약의 계명(613개)을 몽땅 지키도록 요구받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율법의 정신인 사랑을 실천한다면 율법을 능가하는 행위를 수행한 셈이 된다. 그런데 우리들 사이에는 하느님은 사랑한다면서 인간을 미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육안으로 감지될 수 없는 하느님이 닮은 모상으로 모든 사람 안에 존재하심을 망각하고 있는 이들이다. 그래서 하느님을 사랑하다면서 사람을 미워하면 거짓말쟁이가 되는 것이다.(1요한 4,20) 그 사람이 바로 나라면 예수님께서 왜 수많은 율법들 가운데 하나인 하느님 사랑(신명 6,4-5)과 이웃사랑(레위 19,18)을 한데 묶어 가르치시는지를 깨달아야 한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순서(first and second)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독일의 개신교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1884-1976)이 “내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중에 이웃사랑에 대한 의지가 굳건해지며, 내가 이웃을 사랑하는 가운데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순명이 확증된다.”고 했듯이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동시(synchronize)에 일어나는 사건이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주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첫째가는 계명이라 했다. 과연 어떻게 해야 이 계명을 지킬 수 있으며, 이런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온 몸을 다해서 깡그리 사랑하라는 것일 게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첫째에 버금가는 계명이라 하니 방법이 조금은 보인다.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이웃을 사랑하면 되니 말이다. 나에게 좋은 것을 주고 싶은 마음으로 이웃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안다면, 그것은 곧 하느님께 드리는 것이 될 것이다. 유대교의 한 랍비가 제자들에게 이러한 질문을 하였다. “너는 새 날이 밝아 왔음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한 제자가 “예, 암흑으로부터 산과 수풀이 구별되며, 서 있는 것이 건물인지 나무인지가 구별되고, 걸어 다니는 것이 사람인 짐승인지가 구별되면 새 날이 밝아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랍비는 “아니다, 틀렸다.” 하면서 “암흑으로 부터 사물이 서로 서로 구별될 때 새 날이 밝아 왔음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앞에 걸어 다니는 모든 사람들이 나의 사랑하는 형제요 자매로 여겨질 때 비로소 새 날이 밝아 왔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비록 해가 떠올라 밝아졌다 하더라도 영원한 암흑이 계속될 뿐이다.”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박상대 마르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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