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7월06일(주일)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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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7월06일(주일)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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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작성일 : 2008-07-09 조회수 :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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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 5일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 [1821~1846] [오늘의 복음] 마태 10,17-22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17)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18)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19)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20)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21)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22)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복음산책] 순교는 가장 완전한 사랑이다. 오늘 7월 5일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였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순교자를 기념하는 대축일이다. 오늘 미사의 복음은 거의 모든 순교자 성인의 축일에 봉독되는 마태오복음 가운데 파견설교(10장)의 한 부분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당신을 따라나선 사람들 중에서 열둘을 뽑아 사도로 삼으시고(2-4절), 그들을 파견하시면서 대단히 엄격한 선교수행지침과 여장규칙(5-15절)을 훈시하신다.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파견하시는 사도들을 마치 이리떼 가운데로 보내는 양들에 비유하시는 것을 보면(16절), 장차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는 안 봐도 빤한 일이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살아 계시는 동안에 무슨 일이 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세상을 떠나신 후에 복음 선포자와 선포된 복음을 믿게 될 신자들에게 다가 올 박해를 예고하신다. 오늘 복음은 두 가지 모양의 박해예고와 두 가지의 위로약속으로 구성되어 있다. ① 유대인들과 로마제국으로부터의 박해예고(17-18절)와 그 박해에 대처할 수 있는 성령에 의한 증거보장의 약속(20절), ② 가족의 고발과 세상의 적대감 예고(21-22절)와 종말론적 구원보장 약속(23절)이 그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을 포함하여 초기 교회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교 신앙은 끊임없이 박해를 받아왔다. 그러나 그 모든 박해의 순간에 복음 선포자들은 예수님의 약속에 따라 성령으로 충만하여 복음을 증거하였으며, 끝까지 참고 견디어 냄으로써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다. 2,000년 그리스도교회의 역사는 바로 이러한 순교의 역사이다. 그 역사 속에 오늘 우리 한국교회가 깊이 머리 숙여 경축하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 서 계신다. 그분은 우리 한국교회의 첫 사제이시고 한국의 모든 성직자들의 수호자이시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1846년(병오박해) 9월 16일 새남터 백사장에서 군문 효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향년 26세 청춘의 나이로 신부가 된 지 1년 30일 만에 순교의 월계관을 받은 것이다. 김대건 신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한국의 다른 순교자 78위와 함께 복자품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천주교 한국선교 200주년 기념행사를 위해 방한하신 요한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다른 복자 102위와 함께 성인품에 올랐다. 김대건 신부는 1821년 8월 21일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산 45의 1번지에서 아버지 (성) 김제준 이냐시오와 어머니 고 우르술라의 아들로 태어났다. 김대건의 아명은 재복(再福), 이름은 지식(芝植)이었다고 한다. 그의 집안은 이미 열심한 구교 집안이었다. 증조부 김진후 비오와 종조부 김종한 안드레아, 당고모 (성녀) 김 데레사 등 순교자 가문에 태어나 훌륭한 신앙교육을 받았던 김대건은 굳센 기질과 신덕으로 말미암아 1836년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모방 나신부에 의해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유학을 준비하게 된다. 파리 외방전교회는 1830년 교황청에 의해 설정된 조선교구를 돌보기 위해 (성) 엥베르 범 라우렌시오 주교, (성) 모방 나 베드로 신부, (성) 샤스탕 정 야고보 신부를 밀입국시켜 선교하고 있었다. 모방 나 신부는 1836년 12월 김대건 안드레아 소년을 최양업 토마스와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을 보낸다. 도중에 최방제 프란치스코는 병사하였고, 남은 두 신학생만이 훌륭히 학업과 성덕을 닦았으나 나이가 25세에 이르지 못하여 서품되지 못하고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성품이 바르고 재능이 출중했던 김대건은 5년간 유학생활 중에 라틴어, 불어, 영어, 중국어 등 5개 국어를 능통이 구사할 수 있을 만큼 열심히 공부하였다. 당시 마카오 반란으로 인해 두 차례나 필리핀으로 피난을 가 마닐라 근천 롤룸부이에서 지내기도 했다. 1840초 롤룸부이에서 부친의 순교 소식을 접한 안드레아는 마당에 있는 아름드리나무를 안고 슬피 울었다고 한다. 롤룸부이의 맨도사 가정은 입으로 전해 받은 안드레아 신학생의 이야기를 아직도 찾아오는 한국인들에게 들려준다.(본인은 1990년 7월에 그곳을 순례한 적이 있다.) 1842년경 당시 조선이 외국과 수호조약을 맺지 않아 종교자유가 없었음으로 프랑스 루이 필립 왕이 파견한 함대의 세실 제독이 그 계획을 실행하겠다고 나섰다. 김대건은 세실 제독의 통역관이 되어 조선에 들어갈 메스트르 이 신부와 함께 에리곤 호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세실 제독이 갑자기 조선 항해를 중지하게 되어 김대건은 혼자 육로로 본국에 들어갈 계획을 세웠다. 변문에 이르러 조선 사절단의 일원인 김 프란치스코를 만나 본국 소식을 자세히 듣게 되었는데, 성직자를 비롯하여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입국을 서둘러 그해 12월 29일 혼자 의주 변문을 거쳐 입국하였으나 중도에서 본색이 탄로 날 위험이 생겨 다시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돌아갔다. 그 후 김대건은 백가점(白家店)과 소팔가자(小八家子)에 머물며 메스트르 이 신부로부터 신학을 더 배우고, 1844년 12월 15일 페레올 고 주교로부터 부제품을 받는다. 1845년 1월 부제로서 김대건은 어렵게 입국하여 조선에 성직자 밀입국 계획을 세우고 상황을 점검한다. 1845년 4월 다시 중국 상하이로 나가 8월 17일 김가항(金家港) 경당에서 제2대 조선교구장 페레올 고 주교 집전으로 신품을 받아 조선교회의 첫 사제가 되었고, 그곳의 횡당소 소신학교에서 첫 미사를 드렸다. 8월 31일 고 주교와 다블뤼 안 신부를 모시고 라파엘호라 명명한 작은 목선을 타고 상하이를 출발하였으나 폭풍을 만나 9월 28일에 제주도로 표류하게 되었고, 거기서 뱃머리를 돌려 1845년 10월 12일에 충청도 강경리 나바위 교우촌에 상륙한다. 김대건 신부는 선교활동에 힘쓰는 한편 만주에서 연락을 기다리고 있던 최양업 부제와 메스트르 이 신부를 입국시키려고 애썼으나, 의주 방면의 경비가 삼엄해 뱃길을 알아보기 위해 황해 백령도 부근으로 갔다가 순위도에서 1846년 6월 5일 밤에 체포되었다. 체포된 김대건 신부는 황해도 감사 김정집의 심문에서 자신은 조선에서 출생하여 마카오에서 유학까지 했음을 밝히자 감사는 즉시 왕에게 이 사실을 보고한다. 조정에서는 이 사건의 중대성을 인식하여 중신회의를 열고 김대건을 한양 포청으로 압송케 하였다. 일부 대신들은 김대건 신부의 박학한 지식과 특히 외국어 실력에 탄복하여 배교를 시켜서라도 나라의 일꾼으로 쓰자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배교는커녕 그 와중에도 조정 관리들을 교화시키려했던 김대건은 사학(邪學)의 괴수라는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 받는다. 결국 조선교회의 첫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사제생활 1년 1개월만인 1846년 9월 16일에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우리는 한국교회의 오늘을 있게 만든 어제의 주역들 가운데 장렬한 죽음으로써 한국교회의 초석을 놓았던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성인을 기념하고, 그 천상탄일을 경축한다. 성인의 죽음은 불의의 사고도, 자신의 실수도, 강요당한 죽음도 아니었다. 신부님의 죽음은 오직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1코린 10,31) 증거의 죽음이었고, 자신을 포기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을 비운 선택의 죽음이었으며, 스승을 닮고자 하는 적극적 죽음이었다. 모든 순교가 그렇듯이 순교는 가장 완전한 사랑이다.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에 가장 완벽한 사랑의 응답이 바로 순교인 것이다. 모든 순교자의 죽음 곁에는 마지막 반려자(伴侶者)가 있었으니 이는 곧 “누구든지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면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마태 10,39)고 말씀하신 예수님 바로 그분이시다.◆(박상대 마르코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