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4월27일(주일) - 부활 제6주일 > 복음 묵상

백삼위 한인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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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묵상

[] 2008년4월27일(주일) - 부활 제6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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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작성일 : 2008-04-20 조회수 : 2,0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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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활 제6주일 (가해) [오늘의 복음] 요한 14,15-21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실 것이다.> 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16) 그리고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17)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머무르시고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18)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19) 이제 조금만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20) 그날,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21)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복음산책] 성령의 약속과 성령 하느님의 정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유독 요한복음사가만이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행하신 긴 고별사를 보도한다.(13-17장) 그러나 성서학자들은 13-14장이 요한복음의 원초적인 고별사에 속하고 15-17장은 추가로 편집된 것으로 주장한다. 요한복음 21장이 추가로 편집된 것과 같이 15-17장도 요한복음 공동체에 대한 배려차원에서 후에 첨가되었다는 것이다. 그 근거는 14장의 마지막 구절에 해당하는 “일어나 가자.”(14,31b)라는 문구가 제공한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으로 만찬의 자리를 파하고 제자들과 함께 코앞에 닥쳐온 수난의 시간을 맞이하러 가자는 권유를 하시는데, 15장 서두가 ‘포도나무와 농부’에 관한 가르침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15-17장은 13-14장에 대한 후대에 첨가된 부연설명으로 간주할 수 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나누신 후 행하신 기나긴 고별사(13-17장)의 원초적인 부분에 해당된다. 요한복음 13장은 최후의 만찬 후 제자들의 발을 씻김(1-11절), 발을 씻겨줌의 의미(12-20절), 유다의 배반예고(21-30절), 새 계명 선포(31-35), 베드로의 장담과 배반예고(36-38절 끝) 등을 보도하고 있다. 요한복음 14장은 예수님께서 자신이 길과 진리와 생명이심을 선포하신 내용과 아버지와 아들의 일치(1-14절), 성령의 약속(15-26절), 그리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27-31절 끝)에 관한 가르침으로 구성된다. 우리가 예수님의 고별사를 요한복음 13-14장으로 한정할 때, 고별사 전체를 주도하는 가르침은 ①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 ② 아들의 마지막 자기계시와 정체, ③ 성령의 약속과 오시는 성령의 정체를 공개(公開)하는 내용으로 요약된다. 이 세 가지 주제는 순서대로 다루어지거나 독자적인 단락 안에서 다루어지지 않고, 고별사 전체를 오가는 흐름을 주도한다. 물론 성령의 약속과 오시는 성령의 정체성에 관한 보도는 14,15-26에 한정되는데, 여기에서도 사랑의 계명은 함께 언급된다. 이 단락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성령의 약속과 성령에 대한 가르침이다. 우리의 시선을 오늘 복음에 집중시켜보자. 우선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테마를 재삼 언급하시면서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받아들이고 지키는 사람은 곧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며, 나아가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것이라고 가르치신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을 통하여 아들이 드러나게 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21절) 이미 언급된 바 있으며(16-17절), 다시금 언급되는 ‘성령의 약속과 성령의 정체성’에 관한 보도(26절)는 요한복음의 특허품이다. 신약성경 전체에 ‘성령’이라는 단어는 235번 등장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용도는 ‘성령’이라는 단독적인 표현에 머물거나 ‘하느님께서 주신 영’으로 보도된다. 요한복음사가도 처음에는 이런 맥락에서 ‘영’, 또는 ‘성령’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1,32; 1,33; 3,5; 3,8; 3,34; 7,39; 20,22 참조) 그러나 요한복음의 고별사에서 보도되는 표현은 전혀 다르다. 다른 곳에서는 ‘성령’이 다소 비인격적 표현에 머물거나 하느님께 속하여 하느님께서 주시는 무엇의 의미를 강하게 지니고 있지만, 여기서는 글자 그대로 ‘그분’(14,17)이라는 인칭대명사를 부여하여 하느님의 또 다른 ‘위격’(位格)으로, 나아가 ‘보호자’, ‘진리의 성령’으로 계시하고 있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26절; 병행구절 15,26; 16,13; 16,15 참조) 이로써 예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