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5월26일(토) - 부활 제7주간 토요일 > 복음 묵상

백삼위 한인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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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묵상

[] 2007년5월26일(토) - 부활 제7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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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작성일 : 2007-05-25 조회수 :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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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활 제7주간 토요일 - 성 필립보 네리 사제 기념일 [오늘의 복음] 요한 21,20-25 <이 제자가 이 일들을 기록한 사람이며, 그의 증언은 참되다.> 20) 베드로가 돌아서서 보니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따라오고 있었다. 그 제자는 만찬 때에 예수님 가슴에 기대어 앉아 있다가, “주님, 주님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던 사람이다. 21) 그 제자를 본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23) 그래서 형제들 사이에 이 제자가 죽지 않으리라는 말이 퍼져 나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가 죽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고 말씀하신 것이다. 24) 이 제자가 이 일들을 증언하고 또 기록한 사람이다.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있다. 25)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이 밖에도 많이 있다. 그래서 그것들을 낱낱이 기록하면, 온 세상이라도 그렇게 기록된 책들을 다 담아 내지 못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복음산책] 부활시기를 마감하는 에필로그 예수님의 부활시기를 마감하는 마지막 날에 걸맞게 오늘 미사에는 요한복음의 끝 부분이 봉독된다.(21,20-25) 우리는 요한복음 21장이 15-17장과 더불어 추가로 편집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어제 복음에서 보았듯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수제자 베드로를 단독으로 내세워 사랑의 다짐을 받았고, 그 사랑 위에 당신 양떼의 사목(司牧)을 맡기셨으며, 아울러 그가 걸어가야 할 길을 암시하셨다. “나를 따라라.”(19절)는 예수님의 말씀에 베드로가 따라 나섰다. 그 뒤를 애제자(愛弟子)가 따르고 있었다.(20절) 자신의 미래를 계시 받은 베드로는 애제자의 미래도 알고 싶었다. 그래서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21절) 하고 예수님께 묻는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수제자(首弟子)와 애제자(愛弟子)가 차지하는 공동체 안에서의 위상(位相)을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앞서간 복음에서 공동체의 수장(首長)으로서의 위치를 보장받은 베드로가 스승의 사랑을 독차지한 애제자의 위상도 알고 싶었을 것이다. 베드로의 질문에는 호기심뿐 아니라 경쟁심도 다소 포함되어 있는 듯 보인다. 역사적 사실을 따져 볼 때 이 호기심이 베드로의 호기심이라기보다는 요한복음공동체를 포함한 후기 편집자의 호기심이다. 역사적 사실과 시간상의 간격을 따져 볼 때 원래의 요한복음이 기록되던 시점에 베드로는 이미 순교하였고(64-67년경), 요한은 아직 살아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 사이에 스승의 사랑을 받던 요한이 죽지 않을 것이라는 소문이 퍼져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요한이 영원히 불멸한다는 것은 아니고, 적어도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는 죽지 않을 것이라는 소문이 퍼져 있었을 것이다.(23절) 그런데 애제자 요한도 결국은 100년경 도미씨아누스 박해 때 순교하였다. 그래서 21장의 후기 편집자는 애제자가 뒤따르는 장면에서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를 통하여 바로 잡아 주고 싶었던 것이다. 성서 본문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호기심과 경쟁심을 한 마디로 일축해 버리셨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22절) 예수님께서는 애제자의 미래가 베드로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하시면서 베드로의 추종만을 요구하신다. 사실 제자들의 제각기 갈 길은 예수님의 계획안에 들어있다. 제자는 오직 스승께서 이끄시는 대로 따르는 것이 제자 됨의 본성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공동체의 일치를 바라셨고, 일치를 위해 기도하셨다. 그러나 그분은 구성원 모두의 강압적이거나 획일적인 추종은 원치 않으셨다. 즉 내가 이러하니 너도 이러해야 한다는 식의 획일(劃一)은 예수님의 원의가 아니다. 교회 안에는 서로의 비교(比較)나 경쟁(競爭) 등, 우열(優劣)가림을 통한 획일적인 시도의 발상이 적지 않게 있다. 자신의 신심(信心)을 기준으로 삼아 타인의 신심을 종용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 점은 믿음의 공동체가 각별히 경계해야 할 부분이다. 그러나 필자도 바람직하지 못한 생각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나는 신부(神父)로서 이렇게 사는 데 저 신부는 왜 저렇게 사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다. 이런 생각으로 남을 험담하면 그것은 일치를 깨는 일이며 분열을 조장하는 일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계획안에서 자기를 비추어 보고 그 안에서 남을 위해 기도하는 자신의 모습을 본다면 이는 일치를 도모하는 일이다. 일치를 위한 일에는 사랑이 필수적이다. 사랑 없이는 아무 것도 완전하기 못하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