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9월2일(주일) - 연중 제22주일 > 복음 묵상

백삼위 한인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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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묵상

[] 2007년9월2일(주일) - 연중 제22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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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작성일 : 2007-09-02 조회수 :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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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중 제22주일 (다해) [오늘의 복음] 루카 14,1.7-14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1)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가시어 음식을 잡수실 때 일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는데, 7) 예수님께서는 초대받은 이들이 윗자리를 고르는 모습을 바라보시며 그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8) “누가 너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너보다 귀한 이가 초대를 받았을 경우, 9) 너와 그 사람을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이분에게 자리를 내 드리게.’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너는 부끄러워하며 끝자리로 물러앉게 될 것이다. 10) 초대를 받거든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그러면 너를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여보게, 더 앞자리로 올라앉게.’ 할 것이다. 그때에 너는 함께 앉아 있는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11)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12)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초대한 이에게도 말씀하셨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13)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14)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복음산책] 사람을 지혜롭게 만드는 약 유교의 가르침 가운데 중요한 미덕 하나는 중용이다. 중용은 곧 극단 또는 충돌하는 모든 결정에서 중간의 방법이나 태도를 취하는 신중한 실행 및 실천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중은 공간적으로 양끝 어느 쪽에도 편향하지 않는 것이고, 용은 시간적으로 언제나 일정불변함을 뜻한다. 그래서 중용은 매사를 처리할 때 치우치지도 기울지도 않는 불편불의하거나 지나침도 모자람도 없는 무과불급의 방법이나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중용을 희구하는 정신은 유가에서 전인간적인 인격의 가장 중요한 바탕을 이루는 기본요소가 되기도 하고, 도덕적 수양의 최고수준을 상징하기도 했다. 중용의 덕은 끊임없는 자기감정의 절제와 섣부른 행위에 대한 성찰을 요구한다. 이러한 중용의 덕이 우리 사회에서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다. 편을 만들어 갈라서고, 한번 갈라서면 지나치게 기울고 치우쳐 상대방을 근거 없이 반대하며, 한편만 보고 다른 한편을 보지 못하는 우리가 되어간다. 넉넉히 가지고 있으면서도 더 가지려 애를 쓰고, 조금이라도 모자란다 싶으면 남의 것을 넘보면서 상대적 박탈감에 우울해 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남의 것을 빼앗으려 드는 우리가 되어간다. 일등이 아니면 안 되고, 최고와 일류가 돼야 한다는 강박감에 사로잡혀 살아간다. 남보다 늘 앞서가야 하고, 남의 밥이 되었다간 큰일 나는 줄 알며, 졸면 죽는다는 말까지들 한다. 남을 딛거나 밟고 속여서라도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대인관계도 이런 방식으로 성립된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요람에서 무덤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경쟁하고 남보다 높은 곳에 오르려는 우리가 되어간다. 예수님은 유교가 가르치는 중용의 미덕보다 우리의 관행을 뒤엎는 역설의 가르침을 주신다. 서로 남의 밥이 되라 하시며,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하신다. 그분은 우리가 잔치에 초대를 받았을 때는 윗자리보다는 낮은 자리에 가 앉으라고 하신다. 회당에서 윗자리를 다투고 장터에서 인사 받기를 좋아하는 바리사이 사람들은 물론 윗자리를 다투는 제자들까지도 싸잡아 나무라시면서 자신을 낮추는 자가 높여질 것이라고 하셨다. 구약성경에도 하느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교만에는 재난이 따르고 겸손에는 영광이 따른다고 했다.(잠언 3,34; 18,12) 겸손은 자신을 낮추어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고 사람을 지혜롭게 만드는 약이다. 라틴어의 겸손(humilitas)이라는 단어가 흙(humus)에서 나온 이유가 그것이다. 노자도 겸손을 물에 비유하여, 물은 한 번도 높이 가려하지 않으며 그릇에 담으면 그릇 모양대로 자신을 베푼다고 했다. 사랑과 희생, 겸손과 겸양은 참으로 좋은 덕이다. 누구든 이런 덕을 한번이라도 행한 사람은 그 놀라움을 알고 있을 것이다. 사랑과 희생, 겸손과 겸양은 사람을 결코 노예로 만들지 않는다. 특히 하느님 앞에서의 이런 덕행은 오히려 자유를 선물로 받는다. 하느님의 섭리에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기 때문이다. 여기서 자유란 과거에 집착하지 않고 미래를 향하여 하느님께 자신을 여는 것이다. 사랑과 겸손은 의기소침도 아니고 자의식에 대한 결핍도 아니다. 사랑과 겸손은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는 삶의 기쁨이다. 이는 곧 내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자의식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