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5월15일(화) - 부활 제6주간 화요읿 >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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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묵상

[] 2007년5월15일(화) - 부활 제6주간 화요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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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작성일 : 2007-05-15 조회수 : 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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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활 제6주간 화요일 [오늘의 복음] 요한 16,5-11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5)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 그런데도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너희 가운데 아무도 없다. 6) 오히려 내가 이 말을 하였기 때문에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 찼다. 7) 그러나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8)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 9) 그들이 죄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고, 10) 그들이 의로움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내가 아버지께 가고 너희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며, 11) 그들이 심판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복음산책] 예수님의 떠남으로 오시는 성령 오늘 복음의 역점은 예수님께서 떠나야 하신다는 말씀으로 말미암아 근심에 잠긴 제자들을 격려하시면서, 오시는 성령의 정체를 밝혀주려는 데 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떠남이 제자들에게 더 유익한 일, 즉 떠남이 없이는 성령의 오심이 이루어질 수 없음을 강조하시면서, 오시는 성령의 구체적인 업무(業務)를 밝혀주신다. 아울러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5절)고 하심으로써 제자들에게 머물러 계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암시하신다. 이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은 사실 모두에게 중요하다. 예수님께서 ‘가신다.’는 말씀은 공생활 중에도 여러 번 하신 바 있다. 초막절을 맞아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상경하신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예수님을 잡아오라고 보낸 성전 경비병들에게 “나는 잠시 동안만 너희와 함께 있다가, 너를 보내신 분께 간다.”(7,33)고 말씀하셨다. 또 간음한 여인의 죄를 용서해 주신 그 자리에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자신을 세상의 빛으로 계시하시고 난 뒤 “나는 간다. 너희가 나를 찾겠지만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8,21)고 하셨다. 이 두 대목의 경우, 예수님께서 곧 가시게 됨으로써 세상이 처하게 될 절박함과 가시기 직전까지 남아 있는 시간의 애틋함이 잘 나타난다. 이는 세상에 대한 예수님의 경고로서 그분께서 짧지만 아직 머무는 동안에 세상의 사람들은 믿음의 결단을 내려야한다는 것이다. 이 순간을 놓치면 다시는 기회가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세상은 예수님을 볼 수 있는 이 마지막 시간에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선택하여야 한다. 오늘 복음을 포함한 예수님의 고별사(13-17장) 안에도 “나는 간다.”는 말씀은 여러 번 등장한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시고”(13,1) 최후의 만찬을 마련하셔서 고별사를 시작하셨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에도 사랑의 새 계명을 주시면서 제자들과 함께 있는 것도 잠시뿐이며, 그 후에는 당신을 찾을 터인데, 이미 유다인들에게 말한 것처럼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13,33)고 이르셨다. 예수님께서 공생활 중에 언급한 ‘가신다.’는 말씀들이(7,33; 8,21) 시급한 믿음의 결단을 요구한다면, 여기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목전에 다가와 있는 당신의 죽음을 암시한다. 오늘 복음의 서두에 예수님께서는 간다고 하시는데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없다고 하신다마는, 사실은 제자들이 두 번이나 질문을 했었다. 가신다는 말씀과 함께 사랑의 새 계명이 선포되었을 때 시몬 베드로는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13,36)라고 질문한 뒤, 목숨까지 바쳐서라도 주님을 따르겠다고 장담했다가 배반의 예언을 들어야 했다. 이어 예수님께서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14,4)고 하셨을 때 토마스도 나서서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14,5) 하고 질문하였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왜 어디로 가는지를 묻지 않는다고 하실까? 물론 당장 그 자리에서 왜 아무도 묻지 않느냐는 안타까움의 표현일 수도 있겠으나, 2차 고별사를 편집하던 저자가 앞서간 1차 고별사(13-14장)의 내용을 무시했을 리는 없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예수님께서 ‘가신다.’는 것의 또 다른 의미를 주고자 함을 알 수 있다. 결국 첫 번째 ‘가심’이 예수님의 죽음을 의미한다면, 두 번째 ‘가심’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승천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떠남’은 제자들에게 슬픔과 두려움을 조장하지만, 동시에 유익한 사건이 된다. 떠나가시는 조건으로 오실 성령께서 그 빈자리를 채워주실 것이다.(8절) 성령은 바로 이 슬픔과 두려움을 제거해 주실 ‘보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