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5월6일(주일) - 부활 제5주일 (다해) > 복음 묵상

백삼위 한인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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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5월6일(주일) - 부활 제5주일 (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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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작성일 : 2007-05-06 조회수 :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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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활 제5주일 (다해) [오늘의 복음] 요한 13,31-33a.34-35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31) 유다가 나간 뒤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 32)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으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이제 곧 그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33) 얘들아,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 [너희는 나를 찾을 터인데, 내가 유다인들에게 말한 것처럼 이제 너희에게도 말한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34)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복음산책] 사랑의 새 계명, 그 정체는 무엇인가? 부활 제5주일에 봉독되는 오늘의 복음은 요한복음 제2부(13-21장)에 속한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예수님의 긴 고별사(13-17장) 안에 위치하고 있다. 요한복음 제1부가 세상을 향한 예수님의 자기계시(自己啓示)라면, 제2부는 예수님 공생활의 결론이다. 오늘 복음에는 그 결론의 핵심이 들어있다. 바로 새 계명으로 주어진 사랑의 계명이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34-35절) 하고 말씀하셨다. 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유훈으로 전수(傳受)하시려는 이 계명이 새 계명일까? 어떤 면이 새롭다는 것인가?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은 도대체 어떤 사랑인가? 사랑의 계명이라면 희랍의 현자들도 논리적 구조 속에서 서로 다른 가치의 사랑을 알고 있었고, 구약성경도 하느님을 사랑하는 만큼 사랑 받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우선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태도를 공관복음에 비추어 보자. 예수님께서도 모세의 계명을 반복하여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는 계명은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신명 6,4-5)는 것이며, 이에 못지않은 둘째 계명은 “나는 주님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는 것이라 하셨다.(마태 22,39; 마르 12,30-31) 그런데 예수님께서 보신 유다인들의 이웃사랑이란 ‘자기 이웃은 사랑하고, 원수는 미워하는 사랑’(마태 5,43)이었다. 그러므로 유다인들에게 있어서 이웃이란 자기 곁에 함께 사는 모든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미워하는 원수를 제외한 이웃이 되는 셈이다. 이에 반하여 예수님께서 전수하시려는 ‘사랑의 새 계명’은 자기를 미워하고 해를 입히려는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도 기도하는 사랑이다.(마태 5,44; 루카 6,35) 이 점이 바로 예수님께서 설파하시는 사랑의 새로운 국면이다. 이 계명은 단순히 이론적인 것이 하니라 아주 구체적이다. 이 사랑을 위해 예수님께서도 자기 목숨까지 내어놓을 그런 사랑인 것이다. 그래서 새 계명이다. 이제 요한복음이 전하는 사랑의 새 계명을 다시금 잘 살펴보자. 이 사랑의 계명 속에는 사랑의 대상과 사랑의 방법, 그리고 사랑의 결과가 들어있다. 사랑의 대상은 우선 제자들 서로간이며, 방법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사랑하신 것과 같은 방법이며, 사랑의 결과 및 효과는 세상 사람들이 그 사랑을 통해서 제자들을 다름 아닌 예수님의 제자로 알아보게 되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차원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① 예수님께서 ‘서로 사랑하라’ 하심은 공관복음에는 없는 새로움이다. 이는 사랑하는 행위의 주체와 사랑 받는 객체를 따로 정한 것이 아니라 주체와 객체를 한데 묶어 ‘상호간’의 사랑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상호간의 범주 안에 스승을 팔아넘기기 위해 이미 고별식장을 떠난(31절) 유다는 제외되는가? 오늘 복음의 앞서간 대목을 살펴보면 꼭 그렇다고 말할 수 없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실 때가 된 것을 아시고 사랑하시던 제자들을 더욱 극진히 사랑해 주시려는 마음을 모두 담아 12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다. 그 곳에는 배반자 유다의 발까지도 포함되어 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랑의 새 계명이 비록 유다가 없는 자리에서 언급되었지만, 그가 없는 자리이기 때문에 더욱 더 설득력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새 계명의 사랑에는 유다는 물론 모든 원수까지도 그 대상으로 포함된다. 아울러 배반자와 원수들이 ‘상호간’의 사랑을 깨달을지는 의문으로 남는다. ② 사랑하는 방법은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