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7년4월17일(화) - 부활 제2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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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활 제2주간 화요일 [오늘의 복음] 요한 3,7-15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7)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고 내가 말하였다고 놀라지 마라. 8)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 9) 니코데모가 예수님께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하자, 10)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너는 이스라엘의 스승이면서 그런 것도 모르느냐? 1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12) 내가 세상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 13)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15)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복음산책] 하느님 영의 역동성과 창의성 어제 복음에 이어 예수님과 니코데모의 대화가 계속된다. 오늘 복음의 대화는 물과 영에 의해 ‘위로부터 태어남’의 의미에 대한 추가설명(7-10절)과 예수님의 자기계시적(自己啓示的) 가르침(11-15절)의 두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최소한, 그러나 절대적인 조건으로 ‘위로부터 태어나야 함’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니코데모의 생각은 더 이상 진행될 수가 없었다. 이 세상에 한 번 태어난 사람이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올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물과 영’으로 태어나야 함을 제안하신 것이다. ‘물’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물은 생명(生命)과 정화(淨化)를 상징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생명과 깨끗함을 가져다준다. 문제는 ‘영’에 대한 것이다. 영(靈)에 대한 지식은 모두가 짧다. 히브리어의 ‘루아흐’(Ruah)나 희랍어의 ‘프네우마’(Pneuma)는 구약성경에서 ‘바람, 호흡, 영혼, 정신’ 등을 가리키는 의미로 다양하게 쓰인다. 예수님께서는 ‘영’을 니코데모뿐 아니라 사람들이 이해하기 쉬운 ‘바람’에 비유하여 설명하신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8절)는 말은 ‘영’의 자유로운 속성을 가리킨다. 바람이 부는 소리는 우리가 들을 수 있으나, 어디서 불어와 어디로 가는지 간파하기는 쉽지 않다. 오늘날 과학의 발달에 힘입어 기상대가 관측하여 바람의 방향을 예보(豫報)할 수는 있으나, 예보는 어디까지나 예상(豫想)이며, 가정(假定)이다. 따라서 바람의 방향은 언제나 불확실하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바람의 성질에 빗대어 영의 역동성(逆動性)과 창의성(創意性)을 암시하신다. 그래서 곧바로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8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공동번역 성서는 여기서 ‘성령’이라고 말하지만, 희랍어 원문에는 그냥 ‘영’으로 기록되어 있음에 주의해야 한다. 아직까지 하느님 성삼(聖三)의 구조를 언급할 단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대목의 ‘영(靈)’은 그저 ‘거룩한 영’으로 알아들으면 된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언급한다고 해도 하느님에 대한 유일신(唯一神) 사상을 전부로 알고 있는 니코데모가 이를 이해할 턱이 없다. 따라서 니코데모의 반문은 하느님 ‘성령’이 아니라 막연한 ‘영’에 의해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9절)라는 말이다. 이어 예수님께서 “너는 이스라엘의 스승이면서 그런 것도 모르느냐?”(10절)라고 하신 말씀은 꾸중이나 질책이 아니라 니코데모가 ‘영’에 대한 사고의 지평을 넓혀야 함을 고무하는 말씀인 셈이다. 이제 “진실로 진실로”(11절)라는 요한복음의 특유한 패턴을 사용하여 두 번째 단락이 시작된다. 즉 예수님의 자기계시적 가르침이 주어진다는 뜻이다. 이 가르침은 단지 니코데모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니코데모와 같은 부류에 속하는 유다인들뿐 아니라 제자들까지 포함하여 모두를 위한 가르침이다. 따라서 이 가르침은 현장의 청취자 모두를 포함한 세상에 대한 예수님의 자기계시를 의미한다. 예수님의 자기계시(自己啓示)는 그분이 말씀하시는 ‘하늘의 일’이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자기계시적 가르침은 사실상 보류(保留)되고,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예고하는 암시로 마무리된다. 그것은 니코데모를 포함한 세상 사람들이 ‘세상의 일’(바람에 비유된, 또는 바람과 같은 영의 의미와 능력) 조차도 깨닫거나 믿지 못하기 때문에 ‘하늘의 일’을 깨우치거나 믿는다는 것은 더욱 어렵다고 보기 때문이다. 성서학자들은 십자가 죽음에 관한 예고의 대목(13-15절)을 예수님의 직접적인 발설(發說)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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