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AME?
페이지 정보
본문
“아브라함의 이사악의 아버지다.”는 진술을 예로 들면, 아브라함은 원래부터 아버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가 아버지이기 위해서는 보어(補語)로 사용된 이사악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아버지일 수 있는 이유는 아들인 이사악과의 관계 속에서만 가능하다. 아들 이사악이 없이는 아버지 아브라함도 없는 것이다. 물론 그 전에 결혼한 남편으로서의 아브라함은 있다. “나는 박상대 신부(神父)입니다.”라는 진술을 예로 들어보자. 이 진술에서 ‘박상대’는 별 의미 없는, 그렇게 불리는 글자나 이름에 불과하다. 나는 처음부터 신부가 아니었고 1988년 2월 6일 사제로 서품된 이후부터 신부이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신부일 수 있을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따라서 “나는 신부입니다.”라는 진술 안에는 내가 애당초 아니었던 신부임을 지금 주장(主張)하는 것이며, 그래서 신부이며, 끝까지 신부로 있기를 원하는 의지(意志)를 표명하는 진술인 셈이다. 이는 곧 내가 신부인 근거와 이유가 내 안에 있지 않고 다른 곳에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애당초 신부는 물론, 아무 것도 아닌 내가 현재 신부인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것은 적어도 예수님, 하느님, 신자(信者), 주교, 동료사제, 교회, 미사, 기도, 성사집행, 말씀선포, 봉사생활 등, 이들과의 관계 속에 있다. 결국 내가 이런 관계에서 비롯되는 일을 수행할 때 비로소 신부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은 관계 속에서만 실존(實存)한다. 관계없이는 실존할 수 없으며, 관계없이 있는 존재(存在)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래서 인간은 늘 자신의 실존적 관계에 충실하여야 하며, 그 관계를 잘 가꾸고 지켜야 한다. 그러나 하느님은 다르다. 하느님께서 “나는 (무엇)이다.” 라고 말씀하실 때, 어떤 ‘무엇’이 술어(述語)로서 주어(主語)인 하느님을 설명하거나 진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바로 그 ‘무엇’ 자체라는 말이 된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사람인 내가 “나는 (무엇)이다.” 라고 한다면, 나는 원래 그 ‘무엇’ 자체가 아니기 때문에 ‘무엇’이라는 술어(述語)는 주어(主語)인 나를 설명하거나 그 의미와 관계를 밝혀줄 뿐이다. 하느님은 그 어떠한 경우에도 보어(補語)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시면, 그분은 진실로 세상을 밝히는 빛이시며, 우리가 걸어갈 수 있는 길이시고, 진리요 생명 그 자체이시라는 말이 된다. 하느님만이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 요한 6,20)라는 분이시다. 하느님만이 ‘그것일 수 있는’ 이유를 모두 자기 안에 소유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빛이시오, 말씀이오, 진리요, 생명 그 자체이시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은 그 말씀 안에 머무르는 것이며, 나아가 생명이신 예수님 안에 살게 된다. 그러므로 그 사람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게 된다. 여기서 영원한 삶이란 지상에서 마냥 이어지는 ‘지긋지긋할 수도 있는 그런 삶’이 아니라 죽은 후에 맞이하는 새로운 삶이다.(이 대목에서 1999년에 제작된 크리스 콜럼버스 감독, 로빈 윌리암스 주연의 영화 “바이센테니얼 맨”을 한 번 감상해 보시도록 추천하고 싶다.) 사실 영원한 생명의 삶이 지상과 연속된 삶이라면 오히려 불행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영생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전혀 다른 삶이 될 것이다. 유다인들의 눈에는 민족의 조상인 아브라함도 하느님의 예언자들도 다 죽은 것으로 보이지만, 그들은 하느님 곁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있다.(루카 16,19-31/ 부자와 라자로 비유; 마태 17,1-8/ 예수의 거룩한 변모 참조.) 이 생명을 그들에게 주신 분은 바로 하느님이신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보다 훨씬 전인, 천지창조 이전부터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58절) 이러한 언명이 ‘전(前) 실존적(實存的) 그리스도론’을 가능하게 한다. 아브라함은 태어났지만(기노마이, ginomai), 예수님은 처음부터 계시는 분이시다(에이나이, einai). 사실 시간(時間)이 하느님을 구속하거나 제한할 수 없다. 하느님께는 시간(時間)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있다면 하느님은 이를 초월하여 계신다. 하느님을 굳이 인간이 말하는 시간 영역, 즉 과거(過去), 현재(現在), 미래(未來)의 영역에로 끌어온다면, 하느님은 항상 현재에만 계신다. 시작이 없으시니 과거가 없고, 끝이 없으시니 미래가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느님은 현재, 그것도 순수현재(pura praesentia)에 존재하신다. 따라서 하느님은 늘 산 자의 하느님이시다.(로마 14,9) 이로써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자기계시는 절정에 이르렀다. 동시에 유다인들의 불신과 인내심도 그 한계에 달하여 손에 돌을 거머쥐었다.(59절) 그러나 아직은 때가 이르다.◆(박상대 신
- 이전글2007년3월30일(금) - 사순 제5주간 금요일 07.03.30
- 다음글2007년3월29일(목) - 사순 제5주간 목요일 07.0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