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7년3월18일(주일) - 사순 제4주일 (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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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순 제4주일 (다해) [오늘의 복음] 루카 15,1-3.11-32 <너의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1)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2)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1)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12) ...... 30) 31)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32)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복음산책] “래따레” - 즐거워하라, 새로운 예루살렘아! 사순 제4주일은 전통적으로 “래따레(laetare) 주일”이라 불린다. 사순시기가 한창인 사순 제4주일에 ‘오늘은 즐거워하고 기뻐하라’는 취지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극기와 참회, 그리고 육신의 재계로 시작된 은총의 사순시기가 이제 그 반을 넘어 가고 있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듯이, 거의 마지막을 향하여 가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교회는 전통적으로 오늘 사순 제4주일을 “래따레(laetare; 즐거워하라) 주일”이라 부르며, 사순시기의 반환점에서 자칫 지쳐버릴 수도 있는 우리의 영혼과 육신을 메시아의 부활로 선사될 새로운 즐거움과 기쁨을 향하여 용기를 잃지 말도록 권고하며, 가능하다면 사제는 장밋빛 제의를 입고 미사를 드리도록 권장한다. 그런데, 누가, 그리고 무엇을 즐거워하라는 것일까? 오늘 미사전례의 시작을 알리는 입당송을 보면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예루살렘아, 즐거워하라. 그를 사랑하는 아들아, 모두 모여라. 애도하던 이들아,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위로의 젖으로 기뻐 뛰며 흡족해 하리라.”(이사야 예언서 66,10-11) 우선 즐거워해야 할 주인공은 바로 예루살렘이다. 그러나 이 예루살렘은 예전의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시온(Zion)이 아니라, 새 예루살렘을 의미한다. 새 예루살렘은 메시아의 고난과 죽음에 의해 탄생하게 될 새로운 시온이다. 새로운 시온이 즐거워해야 할 이유는 바로 제3이사야로 불리는 이사야 예언서 56장~66장에 잘 나타나 있다. 결국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할 주인공은 신약의 새로운 예루살렘, 바로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인 우리들이다.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죽고 묻힘으로써 새 생명으로 부활하게 될 우리 자신들이 오늘 기쁨과 즐거움에 초대를 받은 것이다. 오늘 봉독되는 복음은 세 편의 비유가 실려 있는 루카복음 15장의 세 번째 비유말씀이다. 세 편의 비유는 ‘되찾은 양의 비유’, ‘되찾은 은전의 비유’, 그리고 ‘되찾은 아들의 비유’이다. 되찾은 양의 비유는 마태오복음(18,12-14)에도 있으나 나머지 두 비유는 루카복음 고유의 특수사료에 속한다. 예수님께서 세 편의 비유를 연이어 들을 들려주신 이유는 15장의 도입부분에 밝혀져 있듯이, 세리와 죄인들이 모두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들었고, 이것을 본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며 투덜거리고 못마땅해 하였기 때문이다.(1-2절) 세 편의 비유는 모두 잃었던 양, 은전, 아들을 다시 찾은 목자, 여인, 아버지의 기쁨으로 종결된다. 이는 곧 세리와 죄인들을 멀리하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과는 대조적으로 이들을 받아들이고 환영하며 잃은 것을 끝까지 찾아 나서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 그리고 다시 찾으신 후 기뻐하시는 그분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오늘 복음에는 ‘잃었던 아들을 되찾고 기뻐하는 아버지 비유’가 선포된다. 이는 루카 고유의 사료이면서도 너무나 잘 알려진 비유로서 때로는 ‘탕자의 비유’로, 때로는 ‘자비로우신 아버지의 비유’로 소개되기도 한다. 당시 죄인이라는 굴레를 뒤집어쓰고 살아야 했던 세리와 죄인들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끊임없이 예수께 모여든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그들을 예수께서는 환영하여 맞아들이고 기꺼이 말씀의 식탁에 앉혀 말씀의 음식을 나누어주시는 것이다. 이는 예수께서 자주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함께 식사하는 것을 비난하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 대한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해명이다. 탕자와 그에 대한 자비로우신 아버지의 비유는 세부묘사가 매우 생생하여 당시의 관습과 법적인 절차를 반영하고 있으며, 동시에 충격과 감동의 영적인 차원에로 청자(靑瓷)들을 초대한다. 비유는 크게 작은아들의 타락, 아버지와 탕자의 관계회복의 두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가운데 탕자의 처절한 깨달음이, 그 마지막에 회복의 불가능을 암시하는 큰아들의 정의(正義)가 각각 그 고유의 역할을 행사하고 있다. 그 과정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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