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3월23일(금) - 사순 제4주간 금요일 > 복음 묵상

백삼위 한인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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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묵상

[] 2007년3월23일(금) - 사순 제4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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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작성일 : 2007-03-28 조회수 : 2,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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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순 제4주간 금요일 [오늘의 복음] 요한 7,1-2.10.25-30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 1) 그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를 돌아다니셨다. 유다인들이 당신을 죽이려고 하였으므로, 유다에서는 돌아다니기를 원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2) 마침 유다인들의 초막절이 가까웠다. 10) 형제들이 축제를 지내러 올라가고 난 뒤에 예수님께서도 올라가셨다. 그러나 드러나지 않게 남몰래 올라가셨다. 25) 예루살렘 주민들 가운데 몇 사람이 말하였다. “그들이 죽이려고 하는 이가 저 사람 아닙니까? 26) 그런데 보십시오. 저 사람이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는데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최고 의회 의원들이 정말 저 사람을 메시아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27) 그러나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28)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29)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30)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복음산책] 지혜서 저자의 예언 비교적 많은 분량의 가르침과 사건들을 담고 있는 마태오와 루카복음을 포함한 공관복음이 서술 구조상 예수님의 전체 공생활 기간을 약 1년 정도로 설정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아울러 공관복음은 예수님의 활동시기와 활동무대를 대략 예수님의 유년시절(베들레헴, 나자렛, 예루살렘) -> 예수님의 세례(요르단 강) -> 갈릴래아 활동기(갈릴래아, 티로, 시돈, 시리아 페니키아, 골란, 데카폴리스 지방) -> 예루살렘 상경기(데카폴리스, 베레아 지방, 사마리아 접경지역과 유다지역) -> 예루살렘 활동기(유다지역, 예루살렘)의 순서로 다루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수난 직전의 마지막 가르침과 죽음과 부활사건(13-21장)을 제외한 비교적 적은 분량을 통해서 예수님의 순수 공생활 기간을 꼬박 3년으로 나누어 보도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의 활동무대가 예루살렘(유다지방)에서 갈릴래아로,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자주 바뀌는 것도 요한복음의 특징이다. 그 사이에 사마리아 지방도 끼어있다. 요한복음만의 이러한 특징들은 복음서 전체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늘 주의를 요하는 부분이다. 오늘 복음은 유다인의 3대 명절 중의 하나인 초막절을 맞아 상경하신(10절) 예수님께서 초막절 기간(7일) 중에 성전에서 가르치신 내용을 전해 주고 있다. 편의상 초막절을 앞두고 아직 갈릴래아 지방에서 있었던 예수와 형제들 간의 대화부분(7,3-9)을 삭제한 채로 오늘 복음은 구성되었다. 우리가 해당 일의 복음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항상 전후 문맥을 살펴보아야 하는데, 오늘 복음은 앞서간 6장의 내용보다는 5장과의 직접적인 연결을 요구한다. 6장은 갈릴래아 호수 근처에서 있었던 빵의 기적과 물위를 걸으신 기적과 생명의 빵에 대한 가르침을 전해주고 있기 때문이며, 차라리 5장의 내용이 오순절 기간 중에 있었던 예수님의 예루살렘 활동을 전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6장의 내용은 단독으로도 중요하지만, 복음서 전체를 꿰뚫고 있는 생명의 빵으로서의 예수님의 정체성을 계시하는 가르침으로 평가된다. 따라서 오순절 기간 중에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가르침과 오늘 초막절 기간 중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행하시는 가르침을 연결하여 오늘 복음을 살펴보는 것이 좋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아들임을 주장하였고, 존재의 본성상 하느님과 같은 하느님임을 주장하였다. 예수님은 자신의 이러한 주장이 진실한 진술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증인 셋을 내세웠다. 그것은 세례자 요한과 하느님 아버지와 성경말씀이었다.(5,31-47) 그러나 세례자 요한도, 하느님 아버지도, (구약)성경도 유다인들의 예수님에 대한 이해를 돕지 못했다. 어느 것도 예수님의 ‘범법적 행위와 신성 모독적 발언’에 대한 증오감을 누그러뜨릴 수 없었던 것이다. 예수님의 자기이해에 대한 호소의 목소리가 높아져가고, 인간의 무지에 대한 안타까움이 성전을 가득 메운 가운데(28절) 가운데, 유다인들은 노골적으로 예수님을 잡으려 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자유를 속박할 수 있는 때는 아직 멀었다. 그 때는 인간이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스스로가 정하실 것이다.(30절)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진리와 지식을 전해주시려는 예수님과 이를 가능한 거부하려는 유다인들의 관계는 오